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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읽는 중세 철학/한글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의 이사고게의 질문들 질문 1

 

둔스 스코투스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의 질문들


 유대칠 옮김

( 토마스철학학교)


<이 번역은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의 질문들』(Quaestiones in lobrum porphyrii isagoge)에 대한 번역이다.

Opera philosophiae 1, eds. Andrew, Etzkorn et al. (The Franciscan Institute 1999)>


 질문 1

 논리학은 학문인가?


 논리학은 학문인가의 여부를 의문한다.


 논리학은 학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앎(학문)의 방식은 학문이 아니다. 논리학은 앎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대전제는 유사한 것에 의하여 명백하다. 예를 들어, 보는 것의 방식은 봄이 아니다. 소전제의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II [3, 995a14-15]에 의하여 제시된다. "앎(학문)과 앎(학문)의 방식을 동시에 의문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리고 앎의 방식은 논리학과 같은 것으로 놓여진다.


 더욱이 형이상학 VI [1, 1026a18-19]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과 자연학 그리고 신적 학문 혹은 형이상학으로 학문을 구분한다. 논리학은 이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후서I [9-10, 76a17-b16]에 의하면 증명(demonstrantio)과 같은 학문은 고유한 원리에서 기인한다. 논리학은 일반적 원리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등등...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학문이란  증명의 결과물(effectus)이다. 또한 논리학 가운데 다수의 증명에 의하여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등등...


 더욱이 "논리학자는 학자(sciens)이다"라는 이 명제는 그 자체(per se)와 확실하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학문이다. 그 자체로 진술이 있는 곳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에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의문의 해결


 논리학은 학문이라 말해야한다. 왜냐하면 다른 여타의 학문과 같이 논리학 가운데 가르쳐지는

 것은 논증적으로 귀결되어진다. 그러므로 알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논증은 앎을 만드는 삼단논법이다." 또한 논증을 위한 모든 필연적인 것이 논리학 가운데 있다. 마치 주체(대상)와 중간 전제에 의하여 주체(대상)에 대하여 논증적으로 되어질 수 있는 받아드림과 같이 말이다. 이것은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은 두 가지로 고려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의 방식에서 가르치는 것인 한에서 고려되어지며, 이러한 방식에 의하여, 필연적인 것과 고유한 원리로부터 필연적 결론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학문이다. 다른 방식에서 그 가운데 사용되는 것에 의하여 적용함으로 논리학이 사용되어지는 한에서 고려되어지며, 이러한 방식에서 고유한 원리로  부터는 아니며, 단지 일반적 원리로부터 기인하며, 이는 학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반적 중간 명제로부터 기인하는 논리적 추론을 전제하는 자연학적 논의에서 명백하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 앎을 야기하진 않는다.


 근본 논증에 대하여


 첫 번째 것에 관하여 앎의 방식은 개별 학문(scientia specialis)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통(communis) 학문이다.


 반대로: 만일 앎의 방식이 학문이란 것이 어떤 의미에서 참이라면, 그러면 추상 가운데 진술은 있을 때, 첫 번째 방식에서 자명하다. 결론은 거짓이다. 그렇게 전건도 그렇다. 추상 가운데 모든 진술은 본질적으로 참임으로 추론은 분명하다. 대상의 사고 가운데 술어대상이 포함되지 않으므로 결론의 거짓은 명백하다.


 더욱이 앎의 방식은 안다는 것보다 뒤의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보다 뒤의 것이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학문보다 뒤의 것이다.


 즉 다른 방식에서 대전제는 형식적으로 말해서 거짓이라고 말해야한다. 혹은 대전제는 거짓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앎의 방식에 대하여 참된 학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자기 대상을 이해하며, 이에 대하여 앎(학문)을 가진다. 그리고 차례로 사고 작용의 반성으로 그 자체에 관한 앎이 요청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선 것은 방식과 같으므로, 그러므로 대상의 근거 가운데 그것을 가질 수 있다.


 근거에 대하여 이 설명이 실질적으로(질료적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앎의 방식은 학문이다"라는 이 진술은 참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은 앎의 방식을 가르친다. 오직 그에 의하여 앎이 요청되어지는 논증과 삼단논법에 대하여 있는 한에서 말이다.


 다른 방식으로 만일 앎의 방식은 논리학에 의하여 설명되어진다면, 연계(copulatio)는 학문과 앎의 방식 사이에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을 의문함과 학문의 방식을 의문하는 것 사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를 의문하는 것이 수반되어지는 것에 의하여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의문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어떤 임의의 것을 의문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즉 하나는 다른 것 남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것에 대하여 나는 실재적 학문을 구분하는 곳에서 말한다. 논리학은 이성적 학문이다.


 세 번째 것에 대하여 논리학은 고유한 원리에 의하여 받아드림을 다루는 것이 확실하다. 즉 이것의 사용은 일반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 수정된 문헌이 귀결된다. 나는 고유한 원리로부터 고유한 결론으로 진행될 때, 학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학문의 결론에 공통된 고유한 원리로부터 기인할 때, 이것은 학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