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버얼리
질료와 형상에 관한 논구
유 대칠 옮김
(토마스 철학 학교)
이 번역은 월터 버얼리의 Tractatus de materia et forma(=de duobus primis pricipiis) 한글 번역이다. 이 저작은 버얼리의 존재론적 입장을 살필 수 있는 1차 문헌 가운데 하나이며 그의 실재론적 사고를 읽을 수 있는 저작이다. 이 글에 라틴어 판본은 H. Shipiro, "More on the 'Exaggeration' of Burley's Realism" Manuscripta 6 (1962), 94-98 이다. 간주와 번역에 있어서는 다음 영역본의 도움을 받았다. P. Spade, "Treatise on Matter and Form" In History of the Problem of Universals in the Middle Ages (at http://pvspade.com/logic) |
1. 실재적으로 단지 실체에 관한 단지 두 가지원리는 오직 질료와 형상뿐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질료는 가능태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 어떤 형상도 가지지 않지만, 모든 형상에 대한 가능태 가운데 존재하며, 그들 모든 것의 주체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합성체의 본질에 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지만, 그 본질의 주체이다. 그것이 없이 본질이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료는 합성체를 위한 근거로 필요한 것이다.
3. 다른 한편에서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7권에서 말하듯이 합성체의 전체적 본질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의 본질이 질료 없이 실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차별적으로 지금 질료 가운데 있는 본질보다 더 고귀한 것이 될 것이다.
4. 개별자는 질료로부터 비-존재를 가지지만, 형상의 본성으로부터 존재를 가진다. 그러므로 제일 질료로부터 구분되는 모든 형상은 비물질적이거나 비소멸적이다.
5. 단지 질료 가운데 찾아지는 형상은 두 가지 존재를 가진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7권의 시작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형상의 본질은 질료의 본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이는 질료와 합성체에 선행한다. 그렇게 질료의 현실태와 합성체의 완전성인 한에서 남겨진 존재를 제외하면, 본성적으로 그 자체 가운데 선행하는 어떤 존재를 가진다.
6.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 가운데 있는 한에서 그것은 두 가지 존재를 가진다. 하나(1.1)는 질료의 어떤 비교 없이 그것은 질료의 본질과 다른 그 자체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고유하게 본질이라고 말 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는 본질적 존재라 불린다.
7. 또 다른 하나(1.2)는 질료를 통하여 다양화되어지는 한에서 질료와의 비교 가운데 있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형상은 현실적으로 질료를 통하여 다양화되어지는 존재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를 습성적 존재라고 부른다.1) 이는 본성이 여러 개별자에 의하여 다수화 되어지는 한에서 본성과 관련된다.
8. 다르게 형상이 질료 가운데 있는 한에서 그것은 두 가지 다른 존재를 가진다. (2.1) 왜냐하면 질료의 현실태이며, 그렇게 엄밀하게 말해서 형상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상은 '형태를 부여함'으로부터 말 되어진다. (2.2) 그러나 그것은 이것에 대하여 집적으로 귀결되어지는 또 다른 존재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질료의 현실태라는 사실로부터 결론적으로 전체 합성체의 완전성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에 의하면 그것은 '통성원리'라고 불린다.
9. 존재의 두 양자는 현실적 존재이거나 존재의 현실태이다. 이러한 존재에 의하여 형상은 그 자체로 실체이며, 개체화의 원리이다.
10. 그렇게 개체화의 원리는 특수자이며 보편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주해자가 『형이상학주해』 7권 보편자에 관한 부분에서 말했듯이 그것들은 특수적 형상이고 특수적 질료이기 때문이다.
11. 형상은 영혼 외부에 네 가지 존재를 가진다. 존재 가운데 보편자를 가지는 보편자는 영혼 외부에 있다. 이 존재는 현실적이지 않으며, 오직 습성적이다. 그러므로 실존의 현실태2)라고 고려되어지는 것에 한하여 특수자를 제외하면 영혼 외부에는 어떤 것도 없다. 왜냐하면 실존의 현실태에 의하면 형상은 단지 질료 가운데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자는 습성에 따라서 영혼 외부에 있다. 이 보편자는 영혼 가운데 보편적 상(species)에 일치한다. 왜냐하면 상은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보편적 본성을 지성이 표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수자 가운데 현실적으로 다양화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화 되어 질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다르게 상은 지성이 질료와 질료적 조건으로부터 추상한 것이기에 현실적으로 보편적 존재3)를 가진다.
12. 보편자는 단지 영혼으로부터 그 존재의 종류 가운데 실존의 현실태를 가진다. 이것은 주해자가 말한 바이다. 즉 "능동지성은 추상에 의하여 현실태에 따른 보편자를 만든다." 여기에 더하여 그리고 습성에 따라서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후서』의 끝부분과 구(舊) 『형이상학』의 시작부에서4)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 질수 있다. 그것은 여러 기억으로부터 영혼 가운데 자리 잡은 하나의 보편자의 경험을 야기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여러 보편자를 존재 하게 만든다. 즉, 단지 영혼 가운데 현실적으로 있는 보편자말이다.
13. 감각으로부터 수용되는 지향은 개별적이고 지성에 의하여 수용되어질 수 없는 것 가운데 물질적 조건 아래 질료 가운데 있으므로, 그것은 능동 지성에 의하여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추상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적으로 보편자가 있게 되며, 가지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추상은 보편자 그 자체에 관한 것 보다 영혼에 관한 것이 더 필연적이다.
14. 『영혼론』1권에서 철학자가 보편자는 아무 것도 무를 혹은 뒤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주해가 『형이상학주해』 11권에서 어떠한 보편자도 영혼 외부의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고 할 때, 이해된 것은 현실태로 있거나 실존하는 존재이지 습성적 존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에서 보편자는 특수자에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에서 추상됨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한 실존의 현실태에 의하여 이해되어진다. 왜냐하면 .만일 우선된 특수자가 파괴되어진다면, 보편자 역시 파괴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습성적 존재에 의하면 보편자는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 본성 가운데 어떤 인간도 없어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개별자에 의하여 다수화 되어지는 경향을 가진 어떤 본성이 있다. 비록 그것은 어떤 것에서도 찾아지지 않아도 말이다. 그렇게 보편자의 존재를 가지며, "어떤 인간이 없어도 인간은 있다"라고 하는 이러한 종류의 명제는 동의되는 이유가 된다.
15. 만일 어떤 이가 이 같은 견해를 반대하여 보편자가 실재적으로 특수자의 외부에 그리고 사고작용을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플라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분리 된 이데아와 같은 것 이라고 주장 한다면, 그렇게 플라톤은 보편적 형상이 특수자 외부에 실존의 현실태를 가진다고 하기에 이는 '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야기하면, 이는 마치 보편자가 다른 사물과 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자는 특수자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 습성적 존재를 가질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되어지는 한에서 단지 개별자 가운데 찾아진다. 형상이란 현실적으로 질료 없이 실존할 수 없으므로 말이다.
16.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론 후서』1에서 이야기하듯이 만일 어떤 이가 여전히 여러 가운데 하나로 있고 여럿을 넘어서지 않은 보편자의 이 정의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존재가 현실적 존재를 부여하지 않으며, 습성적 존재를 부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그 의미는 보편자가 하나라는 것이다. 여럿 가운데 그리고 여럿에 대하여 존재하는 경향을 가진 것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존재에 따르면, 여럿 가운데 습성적으로 있다. 이러한 존재 가운데 확정된 개별자가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에 무차별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은 보편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다수화 되어진다는 한에서 그것은 확정적으로 현재적 개별자를 포함한다. 이러한 존재의 종류 가운데 소멸성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상상이 있지 학문은 없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구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에 반대하며 논의한 곳에서 이야기했듯이 말이다.
©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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