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얼리의 『논리학 기술의 다양성에 관하여』
유대칠 옮김
(토마스철학학교)
비-복합적 명사(名詞)의 의미함을 가정하기 위하여 나는 이
논구에서 명사의 어떤 속성을 다루고자 의도한다. 그 속성은 그것들이 명제들의 부분인 한에서 단지 그것들에 적당한 것이다.
나는 이 논구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부분은 명사들의 지칭(suppositio)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명칭함(appellatio) 그리고 셋째는 계사에
관한 것이다. 지칭은 주어에 속하고, 명칭함은 술어에 속한다. 계사는 술어와 주어를 연결하는 동사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단의적
명제의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이는 우리는 가정하기 전에 돌아 가야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 논구에서 나는 단의적 명제 가운데 명사의 지칭에
관하여 말하기 원한다.
1부. 지칭에 관하여
첫째 부분은 여섯 장으로 구성된다. 첫 장은 일반적으로 지칭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질료적 지칭에 관한 것이다. 셋째는 단순 지칭에 관한 것이다. 넷째는 일반적으로 인칭지칭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다섯째 장은
인칭지칭을 고려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다양한 어려움에 관한 것이다. 여섯째 장은 비-고유한 지칭에 관한 것이다.
1장. 일반적으로
지칭의 구분에 관하여
첫장에서와 같이, 당신은 지칭이 두 가지 의미를 취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넓은 의미에서와 엄밀한
의미에서이다. 지칭은 넓은 의미에서 지칭이 취하는 것은 명제 가운데 다른 명사와 관련되는 명사의 속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칭은 술어와
마찬가지로 주어에 속하며, 동사 혹은 동사의 공-의미어에도 속한다. 우리는 1부의 많은 속에서 이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취해진
지칭은 명칭함이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지칭은 명칭함이 단지 술어에 속하는 반면 술어와 마찬가지로 주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유한 의미라고 불리는 지칭은 술어와 관련되는 주어의 속성이다. 즉 명사(名詞)는 여기에서 명제의 양쪽 끝에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에 의하여 다양하지 않게 취해진다. 그것이 단순 명사인지 형용사적인 것과 실명사적인 것의 모임인지 혹은 형용사의 모임인지 이접 혹은
연접에 의하여 함께 취해지는지.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칭은 사물 혹은 발화 혹은 개념에 의한 어떤 것에 의한 명사를 취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에 나는 지칭의 매우 많은 구분에 관하여 적었던 것을 다시 상기한다. 그러나 현재의 작업에서 나는 그렇게 많은 가지를
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의 현재 목표는 보다 적은 것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 첫 구분에 의하여 지칭은 고유 지칭과 비-고유
지칭으로 구분되어진다. 지칭은 명사가 문자적으로 지칭하는 것을 수락하는 어떤 사물을 지칭할 때 고유하다. 지칭은 말하는 가운데 그것의
규약으로부터 혹은 transumption에 의한 어떤 것을 지칭하는 명사일 때 비-고유적이다.
고유 지칭은 구분된다. 왜냐하면, 한
종류는 형식적이고 다른 것은 질료적이다. 지칭은 발화가 그 자체를 지칭할 때 혹은 발화가 그것을 하위로 하지 않은 다른 발화를 지칭할 때
질료적이다. 첫 종류의 예를 들어보자. "인간은 두 개의 글자이다." "인간은 명사(名辭)이다" "'카토의'는 소유격이다." 등등. 두 번째
종류의 예를 들어보자.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은 참된 명제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이다'라는 발화를 지칭한다는
발화이고,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라는 발화는 '인간이 동물이다'라는 발화에 상위 것도 하위의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지칭이 발화
그 자체를 지칭하거나 혹은 그것에 하위 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발화를 지칭하거나 할 때 질료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간혹 발화는 그것에 하위인
어떤 것을 지칭하며, 그리고 그 경우 가운데 그것은 인칭적으로 지칭한다. 하위인 것이 발화인지 혹은 사물 혹은 개념인지. 그러므로 어떤 것이
"모든 명사는 발화이다"라는 말할 때, '명사'라는 명사(名詞)는 단지 발화를 지칭한다. 그러나 왜냐하면 이들 발화는 '명사'라는 발화 가운데
구성되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질료적으로 지칭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칭적이다.
형식지칭은 두 가지 종류이다. 왜냐하면 명사(名詞)는 간혹
의미대상을 지칭하며, 어떤 때는 그 지칭대상을 지칭하거나 참으로 서술되어지는 어떤 단수자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형식 지칭은 인칭지칭과
단순지칭으로 구분되어진다.
지칭은 명사(名詞)가 그 지칭대상 혹은 지칭대상들 혹은 명사가 우유적으로 서술되어지는 어떤 단수자를 지칭할 때
인칭적이다. 나는 단수의 집합 명사 혹은 구체 명사로 인하여 마지막 조항을 귀결한다. 분명하게 그러한 명사는 인칭적으로 혹은 단순하게 지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귀결의 각각은 참이다. 지칭의 한 종류에 의하면, 혹은 다른 종류에 의하면, "하얀 소크라테스는 우유적으로 존재자이다",
"하얀 소크라테스는 실체이다." '하얀 소크라테스'는 그 의미대상, 즉 전체 집합을 지칭함으로 그것은 단순 지칭이다. 그리고 "하얀 소크라테스는
우유에 의하여 존재자이다"는 참이다. 그러나 '하얀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를 지칭하는 한에서 그것은 우유적으로 서술되어지며, 이는 인칭 지칭을
가진다. 그 경우에서 "하얀 소크라테스는 실체이다"는 참이다.
그러므로 나는 형식 지칭이 인칭 지칭과 단순 지칭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그들 하위가 단수적이거나 공통된 것이거나 그것들이 사물이거나 발화이거나, 지칭은 공통 명사가 그 하위의 것을 지칭할 때 인칭적이며 혹은 구체적인
우유적 명사 혹은 혼합 명사는 우유적으로 서술되어지는 것을 지칭 할 때 인칭적이다. 그러나 지칭은 공통 명사 혹은 집합 단수적 명사는 의미하는
것을 지칭할 때 단순적이다.
2장. 질료적 지칭에 관하여
지금 우리가 살핀 것은 지칭의 일반적 구분이며, 우리는 개별적인
각각의 가지를 살펴야하고, 우선 질료적 지칭을 살펴야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지칭이 발화가 발화 그 자체를 지칭하거나 쓰여진 것 그 자체를
지칭하거나 혹은 그러한 방식에서 취해지는 전자의 발화에 아랫니 있지 않은 또 다른 발화를 지칭할 때 질료적이며, 또한 다른 지칭을 취하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지칭의 한 종류 아래에 발화가 취해질 때 혹은 지칭할 수 없거나 발화가 어떤 방식에서 그것이 지칭할 수 없거나 혹은 지칭을
가지는 그러한 방식 가운데 취해지는 그 자체를 지칭할 때 질료적이다. 이 모든 경우에 명사는 질료적 지칭을 가진다.
첫 경우에 어떤 이는
'인간'이라는 발화를 말하거나 발음하는 것을 가정한다. 그 경우에 "인간은 발화이다" 혹은 "인간은 말된 발화이다"는 참이다. 그리고 그 명제가
참인 한에서 '인간'이라는 발화는 말된 그 자체를 지칭하고 질료적 지칭을 가진다.
두 번째 경우에 같은 상황이 취해진다. 만일 "인간이
말된 발화이다" 혹은 인간은 말된 것이다"라는 이것이 쓰여진 것이라면, 그러면 이 쓰여진 표현은 참된 의미를 가진다. 즉 '인간'이라는 쓰여진
단어가 말된 그 자체를 지칭하는 한에서 말이다. 혹은 '인간'은 이 페이지에 쓰여진 것을 가정하자. 그리고 어떤 것이 "인간은 이 페이지에
쓰여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된 의미를 가진다. 즉 '인간'이라는 말된 발화가 쓰여진 것 그 자체를 지칭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지칭은 질료적이다.
세 번째 경우에서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은 평서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라는 발화가 "인간이 동물이다"라는 발화를 지칭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지칭은 질료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료적 지칭을 가지는 주어에 따라서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은 평서문이다"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라는 발화는
"인간이 동물이다"라는 것을 혹은 그 자체를 지칭할 수 있는 한에서 구별되어질 수 있다. 첫 경우에서 그 명제는 거짓이고,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은 명사절이다"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 "인간이 동물이다"를 지칭하는 한에서 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번째 경우의 분명한 예를
가진다. 그것은 어떤 발화가 그것에 속하지 않은 또 다른 것을 지칭할 때 지칭이 질료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예가 있다. "동물이라는
발화는 인간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 이것은 '인간에 대하여'라는 발화가 '인간'이라는 발화 그 자체를 지칭하는 한에서 참이다. 왜냐하면
'동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인간'이라는 발화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며, 그 자신의 올바름 가운데 '인간에 대하여'라는 발화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다"는 "인간에 대하여 동물이다"라 참이고, 잘못 형성된 것일 때 참이다.
여기에서 네 번째 경우의
예가 있다. "모든 인간은 달린다"는 명제에서 '인간'이라는 명사는 인칭지칭을 가진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은 인칭적으로 A 가운데
지칭한다"라고 말해야한다면, A는 "모든 인간이 달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칭적으로 A 가운데 지칭한다"는 참인 명제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칭적으로 A 가운데 지칭한다" 가운데 '인간'이라는 발화는 인칭 지칭을 가지지 않는다. 그 명제가 참인 한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인칭 지칭이라면, 그 명제는 거짓이며, 그 이유는 그 개별자들의 각각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칭적으로 a 가운데 지칭한다"가
참인 것은, '인간'이라는 명사가 질료적으로 "<모든> 인간은 달린다" 가운데 인칭적으로 놓여지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한에서 참이다.
유사하게 "인간은 A 가운데 분류되어진다"는 것은 같은 방식에서 참이다.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라고 어떤 것이 말하는 것에서 다섯
번째 예가 있다. 이것은 "하얀 것'이라는 발화가 실체적으로 (혹은 실체적 방식에 따라서, 비록 그것이 실체적인 것이 아닐 지라도) 취해지는
한에서 참이며, 형용사적으로 취해지는 것 자체를 지칭하거나, 그것이 지칭하지 않은 한에서 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하여 지칭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한에서, 어떠한 서술어도 증명되어질 수 없다. 어떤 것이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 증명되어질 수 있다.
그렇게 명사는 질료적으로 다섯 가지로 지칭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만일 다른 방식이 찾아진다면, 그것들은 이것들과 유사하거나
이것으로 환치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첫 방식은 말된 명사가 말된 것 그 자체를 지칭할 때 일어난다. 같은 방식에서 혹은 쓰여진 명사는 쓰여진
것 그 자체를 지칭한다. 둘째 방식에서 말된 명사가 쓰여진 것 그 자체를 지칭할 때이다. 혹은 역이 그렇다. 세 번 째 방식은 명사와 발화가
그것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발화를 지칭할 때이다. (나는 "그것이 하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그 하위를 지칭한다면,
그것은 질료적으로 지칭하지 않을 것이지만, 인칭적으로 지칭할 것이다) 네 번째 방식은 지칭 가운데 취해지는 명사가 또 다른 지칭 가운데 취해지는
그 자체를 취하는 것을 지칭할때이다. 다섯째 방식은 명사가 지칭 가운데 취해지는 명사가 지칭할 수 없는 것으로 취해지는 그 자체를 지칭할
때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경우에 있어서 어떤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 가운데 만일 명제가 참이라면,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있는 지칭대상을 가져야한다. 그러므로 지칭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하여 지칭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그러므로 따라서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는 거짓이다.
같은 경우에서 "'모든'은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단의어이다"라는 그러한 경우에
대하여 의심스럽다. 이것은 참이다. 그러므로 '모든'이라는 것은 단의어적으로 혹은 공의어적으로 취해진다. 만일 단의어적으로 취해진다면, 그러면
그 명제는 거짓이며, 그 이유는 '단의어적으로 취해지는 모든 것은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단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이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공의어라면, 그러면 그 명제는 잘못 형성된 것이고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모든'은 어떤 것을
지칭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어떤 것을 의미 할 수도 없다.
첫째에 대하여 나는 마지막 가지에 따라서 질료적으로 취해지는 '하얀 것'인
한에서 그리고 실체적인 것의 방식에 따라서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는 참이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형용사적으로
취해지는 것 그 자체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용사적 방식에서 취해지는 한에서 그것은 지칭할 수 없다. "어떤 것이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것으로 하얀 것은 지칭대상이며, 그것은 지칭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여기에서 지칭하는 것으로 지칭하는 것이
지칭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는 참이다. 왜냐하면 '하얀 것'은 여기에서 '하얀 것'이 여기에서
지칭하는 방식에서 지칭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 명제는 매우 분명하게 참일 수 있다. 비록 서술어가 주어 혹은
그것을 지칭하는 것에 따라서 주어가 지칭하는 것에 속한다고 하여도 말이다. 가까이에 그 경우 가운데 이와 같다. 왜냐하면 '하얀 것'은
실체적으로 취해지며 실체의 방식에 따라서 취해기는 것이며, 이는 형용사적으로 위채지는 그 자체를 지칭하며, 어떤 의존되는 것의 방식에 따라서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해짐으로 지칭하는 능력은 그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얀 것은 지칭할 수 없다"는 실체적으로 취해지는 '하얀
것'이 형용사적으로 취해지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한에서 참이다.
같은 것은 두 번째 반론에 대하여 이야기해야만 한다. "모든이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공의어이다"가 참이라고 말되어질 때, 우리는 '모든'이 질료적으로 취해지는 한에서 그리고 공의어의 방식에 따라서 취해지는
한에서 참이라고 <답해야한다.> 이미 그것은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것 그 자체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이다. 비록 서술어가
여기에서 그것이 지칭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지칭하는 것에 속하는 서술어의 이
긍정의 진리에 대하여 충분하다. 그리고 이것은 참이며, 그 이유는 어떤 명제 가운데 '모든'은 공의어적으로 취해지는 공의어인 것은
분명하다.
©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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