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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이슬람철학의자리

아비첸나 노트:형이상학과 자연학의 갈림길에서...

 

아비첸나 노트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갈림길에서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1.들어가면서

중세 서양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이라면 누구나 아비첸나라는 이름을 듣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실로 스콜라 철학을 받치고 선 대표적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은 무슬림의 철학자이다. 그렇기에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일부가 줄곧 이교도란 이름으로 거부한 무슬림이며, 동시에 유럽에 새로운 철학의 기운을 불어넣은 산파와 같은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역에 미친다. 시대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후기 옥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가 영향력을 그치지 않았고, 영역적으로는 존재론에서 심리철학 그리고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철학 대부분에 영향력을 끼쳤다.1)

하지만 그의 철학은 많은 부분에게 우리에게 큰 어려움을 준다. 우선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의 이해에 의하여 중개된 아비첸나의 이해가 아닌 아비첸나 그 자신에게로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는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사용하였다. 비록 이 아랍어에 대한 라틴어의 번역이 있지만, 라틴어 번역 역시 아비첸나 그 자신의 언어는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옥캄과 같은 철학자에 관한 현대 학자들의 다양한 문헌학적 성과를 아비첸나에선 힘들게 하였다. 물론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구타스(D.Gutas)의 『아비첸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통』과 같은 연구 성과물은 아비첸나의 다양한 저서의 영어 번역과 그 번역이 기초한 각각의 판본을 소개하는 한편 연대기적으로 아비첸나의 저서들을 정리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2) 하지만 이와 같은 구타스의 논의도 아비첸나의 철학 전역에 걸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함에 완전히 다다르지는 못하고 있다.

아비첸나의 철학은 어떻게 성립되고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떻게 정리되어 갔는가.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고민은 무엇인가? 우리의 고민은 많은 부분은 중세 유럽인을 경유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저서 속에서 고민하고 전개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고민은 어떤 것이었는가. 본 논의는 이러한 논의 가운데 하나의 흐린 외곽을 그리고자 한다.

아비첸나의 논의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뚜렷하게 논의된 것은 지성(intellectus)과 실존(existentia)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은 중세 유럽의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지성단일성론과 존재론의 영역에서 이 둘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아비첸나 자신의 고민 속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 아비첸나 자신도 자신이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그 자신도 다른 철학자들의 논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에 그리스도교에 영향 속에서 철학을 전개하였듯이, 그렇게 이슬람교 가운데서 영향을 받고 사고를 전개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본 논의가 그리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아비첸나 내부의 고민이다.

‘필연적 실존’(al-wājib wujūduhu)3)은 아비첸나 이전에도 이슬람 신학(Kalām)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이전의 무슬림 철학자들에게도 필연적 실존에 관한 논의와 나름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필연적 실존은 신의 속성(ṣifāt)으로 아비첸나 이전에도 무슬림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여겨지고 정의되며 다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신의 속성으로 필연적 실존은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당시 이슬람 철학과 신학의 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영향 가운데 또 다른 논의가 등장한다. 그것은 ‘제일 원동자’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자연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신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관한 두 가지 논의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비첸나는 이러한 것을 검토하고, 제일 원동자를 신에 관한 것으로 정의하는 당시의 논의를 논박한다. 신 혹은 제일 진리는 필연적 실존이기는 하지만, 제일 원동자로 서술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아비첸나가 구상한 철학의 체계 혹은 인간 지식의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논의는 이성적 영혼에 관한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성적 영혼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에선 자연학의 한 영역에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natura), 즉 인간의 자연적 측면을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학이란 생성소멸하는 것에 대한 학문이지만, 이성적 영혼은 그러한 것인가. 아비첸나를 이를 거부하고, 이성적 영혼에 관한 형이상학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면서 이성적 영혼을 자연학의 영역을 넘어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넘긴다. 초기 저서엔 영혼에 관한 것을 자연학에 속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성적 영혼은 이성적 영혼의 영역에 속한다고 나누어 다룬다. 이는 대상의 특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중기 저서인 『치료』의 심리철학적 부분인 영혼론에 관한 부분에서 아비첸나는 이를 형이상학의 고유한 대상으로 정의한다.4) 이 역시 아비첸나가 이해하는 학문의 체계에 관한 논의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비첸나가 제일 진리를 제일 원동자로 이해하지 않는 것은 그의 학문 체계에 관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이성적 영혼을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앞으로 본 논의는 이러한 논의를 아비첸나의 내적 고민을 따라가 정리해 보고자 한다.


2.형이상학과 자연학의 대상

아비첸나는 그의 초기 저서인 『영혼에 관한 개요』(Compendium de anima)에서 철학의 분류를 전개한다. 우선 철학은 하나의 인식 혹은 지식 체계의 하나이기에 지식의 주체인 지성의 두 분류에서 철학 혹은 학문의 분류를 시작한다. 지성이 지식을 가지는 방식을 아비첸나는 두 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신적 영감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의 배움과 같은 것에 의한 것이다. 이 가운데 후자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철학과 학문이 속한다. 이 철학은 몇 가지 부분으로 구분된다. 논리학과 수학과 그리고 자연학과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다시 몇 가지로 구분된다. 크게 보편학문과 신학이다. 자연학은 감각적인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더 자세히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적 대상이다. 반명 생명소멸하지 않은 초월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은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아비첸나에게 이성적 영혼은 자연학의 영역 있지 않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저서인 『영혼론』에서 그 논의가 시작한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 이유를 이성적 영혼이란 자연의 영역을 넘어 비물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이를 담당하는 분야를 신학의 한 분야로 이성적 영혼에 관한 형이상학이라 규정한다. 왜냐하면 이성적 영혼에 관한 논의는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상태에 관한 논의이며, 이는 다분히 신학적 측면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비첸나는 자연학은 말 그대로 자연의 영역에 한정하고, 형이상학은 이 자연을 넘어선 것을 다룬다고 보았다. 우선적으로는 존재론적 기반작업 뿐 아니라, 제일 원리에 관한 논의를 그 대상으로 하며, 한편 신과 관련된 논의와 영혼에 관한 논의 그리고 사후에 관한 논의 등과 같은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5) 아비첸나는 이러한 학문의 분류에 따라서 그 대상을 구분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성적 영혼이 형이상학의 대상이듯이, 신도 형이상학의 대상이며, 이는 자연학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신은 경험의 영역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철저하게 형이상학의 영역에 있다. 앞으로 이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논의를 정리해 보자.


3.이성적 영혼은 자연학의 대상인가 형이상학의 대상인가?

아비첸나의 초기 저서인 『영혼에 관한 개요』에선 영혼에 관하여 다소 혼잡한 논의를 제공한다. 아비첸나의 자연학의 영역 가운데 영혼론을 둔다. 그리고 이 영혼론을 인간의 자기 본성과 자기 존재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인간 자기의 본성에 관한 연구가 자연학의 대상이란 말이다.6) 하지만 아비첸나는 이성적 영혼은 자연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그러면 영혼은 자연학의 대상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된다. 동일한 대상이 두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렇다면, 영혼이란 자연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초자연계의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문제가 야기한다. 자연학의 대상으로 영혼은 인간의 자기 본성에 관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그러면 왜 이성적 영혼은 그러한 자연계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가? 이는 아비첸나의 심리철학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영혼에 관한 개요』에서도 확인되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인간이 가진 지성을 수동적인 것으로 마치 제일 질료와 비교하여 가능지성과 같은 것이라 규정한다.7) 그리고 이 지성은 스스로 형상을 가지지 못하며,8) 신적인 것에 의하여 계시로 받아드려지거나, 추론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이와 같은 지성은 지식의 획득과 관련된 것으로 인간의 본성적 측면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영혼은 육체적 운동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인간의 본성적 측면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영혼에 접근하는 길에서 영혼은 어디까지나 자연적 산물의 한 측면이며, 그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혼에 관한 논의는 어디까지나 자연학의 영역에 있다. 하지만 그의 심리철학에 의하면 영혼은 단지 그러한 존재론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이성적 영혼은 비물질적 상태에 있다. 완전한 비물질의 상태는 육체 가운데도 혹은 육체의 능력 가운데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만이 육체 혹은 육체의 능력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적 상태와 완전히 결별한 이성적 영혼의 존재론적 측면에 대한 접근은 자연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러한 논의는 그의 중기 저서인 『치료』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서 아비첸나는 영혼의 목적(ma'ād)은 결코 자연학의 영역이 아니며, 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다루는 철학적 논의의 장에서만 가능하다고 정의한다.9) 이러한 아비첸나의 입장은 그의 후기 저서인 『이성적 영혼에 관하여』에서도 이어진다.


“이성적 영혼은 자립적 실체이고, 이는 인간 육체 가운데도 다른 육체적 존재 가운데도 놓여지지 않으며,... 이는 육체와 함께 실존하게 되지만, 그 이전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사라지고 죽고 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10)


이성적 영혼은 자립적 실체이며, 사후에도 그 존재는 존속된다. 이러한 영혼에 관한 논의는 자연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 물질적 영역을 벗어난 영혼은 이성적 영혼에 관한 형이상학이란 이름의 신학의 영역에 편입한다.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하나의 대상도 그 접근의 방식에 따라서 그 영역을 달리하였다. 영혼이 육체와 관련되어 다루어질 때, 육체의 운동과 그의 어떤 작용의 원리로 다룰 때, 영혼은 자연학의 영역이다. 하지만 육체를 벗어난 차원에서 혹은 육체를 넘어선 초자연적 영역에서 영혼, 즉 이성적 영혹은 형이상학의 영역에 있다.

자연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이러한 아비첸나의 이해는 필연적 실존에 관한 논의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4.신과 필연적 실존의 문제.

신은 자연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 신은 우리가 물질적 차원에 있는 생명체의 원리를 다루듯이 그렇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것이 아비첸나가 신에 관하여 생각하는 기본적 입장이다.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신과 지성은 질료도 아니고, 질료와 관계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질료와 분리된 것이다.11)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신은 질료적인 어떠한 것도 넘어선 혹은 벗어난 존재이다.

중세 서양의 철학에선 신에 관한 철학적 담론에서 크게 두 가지 형태의 것을 선보인다. 하나는 운동의 원인으로 제일 원동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근거인 필연적 실존이다. 이는 신 존재증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그 이전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필연적 실존은 아비첸나 이전에 알 킨디의 전통을 이어가는 철학자들에게서도 보여진다. 신플라톤주의와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지한 알 킨디는 신플라톤주의에 의존하여 신을 세상의 모든 것의 존재 원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신은 우연한 존재일 수 없고, 필연적 존재가 된다.12) 이와 같은 알 킨디의 논의는 이후 중요한 무슬림 철학자인 아미리('Āmirī)에게로 이어진다. 아미리는 신의 존재는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구분되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이며, 반면 세상의 존재는 우연적이라고 한다. 즉 신의 본질은 필연적 존재(wa-ḏātuhu wājibatu l-wujūd)란 것이다. 신의 존재를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구분되며, 동시에 세상의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인 필연적 실존으로 가정하는 것은 무슬림 철학에 있어 아비첸나 이전에 이미 마련된 소재였다. 아비첸나는 이를 가져와 체계화한다.

하지만 신에 관한 논의는 필연적 실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근거한 부동의 원동자란 개념이 있다. 아비첸나는 필연적 실존에 관한 지식만큼이나 이에 관한 지식과 논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서로 구분되는 길에 서 있다고 보았다. 필연적 실존은 형이상학의 논의 가운데 있지만, 부동의 원동자는 자연학의 논의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아비첸나와 동시대인이며 연상인 아부-술라이만(Abū-Sulaymān)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아부-술라이만은 부동의 원동자와 관련된 논의는 자연학의 논의이고, 필연적 존재에 관한 논의는 형이상학과 관련된다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에 관한 논의는 자연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한다고 한다.13) 즉 신의 본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아비첸나는 존재하는 것을 두 가지로 이해한다. 하나는 우연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연적인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는 그 존재의 근거를 가지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 존재를 근거를 다른 곳에서 가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14) 이는 그가 초지일관 논의하는 것이다.15) 스스로 존재하며, 이는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즉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론적으로 존재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의 존재 근거이지만, 그 자신은 다른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가 초지일관 논의하는 필연적 실존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러한 필연적 실존으로 신은 물리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필연적 존재인 한에서 신은 존재의 근거이며, 이러한 신에 관한 접근은 형이상학적 접근이다. 자연학이 아니다. 자연학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 혹은 자연적 사물의 원리에 관한 것이다. 존재의 원인은 자연학의 영역이 아니다. 자연학의 영역은 운동의 영역이지, 존재 그 자체의 원인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아부-술라이만와 아비첸나는 신에 관한 이러한 논의를 형이상학의 영역, 혹은 신학의 영역에 편입시킨다.

신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존재이다. 신은 자연학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비첸나에게 이는 하나의 상식이다. 신은 자연학의 영역이 아니다. 즉 자연학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자연적 원리나 자연적 현상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넘어선 것을 다룬다.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영혼은 자연학의 영역에 있다. 그것은 육체의 운동 원인이고, 생명의 현상인 한에서 이다. 그러나 사후 영혼이나, 자연적인 것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인 이성적 영혼은 신학 혹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그것은 신학은 자연학의 논의를 넘어서 있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자연학은 자연적 원리의 한에서 존재하는 것을 다루지만,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다르다. 그렇기에 신은 자연학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하여 그는 부동의 원동자로 신에 관한 논의를 거부한다.

후기 아비첸나는 운동이란 수단에 의하여 설명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결과물, 즉 제일 원동자로 신을 설명하는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신은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을 자연학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신은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그에게 형이상학은 제일 철학과 신학적 논의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은 신학의 대상이며, 형이상학의 대상에 포함된다. 물론에서 신은 고유한 형이상학의 직접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필연적 실존으로 신에 한정한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직접적으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필연적 존재로 신인 한에서 형이상학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논의는 후에 시제 브라방에게 이어질 것이다. 하여간 필연적 존재로 신은 형이상학의 대상이지만, 부동의 원동자로 신은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학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5.정리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에서 학문을 분류하고, 그 대상을 분명히 한다. 그저 영혼은 자연학의 영역에 두고, 이성적 영혼은 형이상학의 영역에 두는 그것은 그 학문들의 영역에 가지는 영역과 그 대상에 의한 것이다. 비록 하나의 대상으로 영혼이지만, 생명작용이나 물질적 운동의 원리인가, 아니면 그러한 것을 넘어선 비-물질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인가에 의하여 그 다루어지는 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에 관한 논의도 그렇다. 신을 다루는 전통적 논의는 부동의 원동자에 의한 것과 필연적 실존에 의한 것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아비첸나는 전자의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자연적 운동을 전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것으로 신이라면, 그것은 신이 자연학의 대상에 속하게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아비첸나는 이를 파기하고, 후자만을 취한다.

아비첸나가 신을 형이상학의 대상에 편입한 후, 그 신에 관한 신앙적 논의를 어떻게 이성적 학문인 형이상학 가운데 논의를 전개하는가하는 여전히 필자에게 의문이다. 이는 차후의 논의로 미루고 여기에서 글을 마친다.






<딸림 자료 ١>


1. ꡔ영혼에 관한 개요ꡕ에서 발췌16)


8장


n.1 가지적인 것을 개념 할 수 있는 것에 의한 기능을 통하여 비이성적인 것으로부터 이성적 생명체의 종(種)임은 의미할 것도 없다. 이 기능은 이성적 영혼이라 불린다. 비록 그것이 '질료적 이성'이라 불리는 것이 관습적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제일〕 질료와의 비교에 의하여 가능지성인 것이기 때문이다.

n.2 이 기능, 그것은 전체 인간 종 가운데 실존하며, 이는 그 자체 가운데 어떤 가지적 형상을 가지지 못하지만, 이는 오히려 두 가지 방법의 하나 가운데 그것과 함께 일어난다. 우선된 것은 신적 영감을 통한 것이고, 감각의 배움이나 사용의 과정 없이 말이다. 마치 부분에 비하여 전체가 크다는 것과 두 가지 반대들은 동시에 단일 사물 가운데 현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과 같이 가지적인 것에 앞선 것과 함께 사실이듯이 말이다. 성숙한 지성적 능력의 사람은 이들 형상을 얻는 특성에 한 몫 한다.


n.3 두 번째 방법은 추론을 통하여 그것을 얻는 것이고, 증명을 통하여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래의 경우처럼 말이다.

n.3.1 논리학 논리적 진리의 개념화. 예를 들어, 류들, 종들 그리고 차이 그리고 속성 그리고 우유 (포르피리우스의 ꡔ이사고게ꡕ); 단순한 단어와 합성된 단어의 다른 종류들 (ꡔ명제론ꡕ); 참과 거짓 양자의 추론의 합성 (ꡔ분석론 전서ꡕ); 추론을 형성하는 것을 조직할 때, 필연적인 그리고 검증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명제 (ꡔ분석혼 후서ꡕ); 혹은 더 참된 혹은 거짓된 것과 변증법 (ꡔ변증론ꡕ) 혹은 동일하게 참과 거짓 그리고 수사학 (ꡔ수사학ꡕ) 혹은 거짓 보다 덜 진리 그리고 궤변 (ꡔ소피스트적 논박ꡕ), 혹은 불가능 (동일하게 전체적으로 거짓) 그리고 시(ꡔ시학ꡕ)

n.3.2 자연학 물리적 대상의 증명. 예를 들어, 질료, 형상, 결핍, 본성, 장소, 시간, 정지 그리고 운동 (ꡔ자연학ꡕ); 천체와 요소들의 결합에 의하여 물체 (ꡔ천체론ꡕ); 생성과 소멸의 원리 (ꡔ생성소멸론ꡕ); 나의 것 가운데 대기 가운데 현상의 생성 (ꡔ기상학ꡕ) 그리고 대지의 표면에 간한: 혜성 (ꡔ혜성론ꡕ) 그리고 동물들 (ꡔ동물연구론ꡕ, ꡔ동물부분론ꡕ, ꡔ동물운동론ꡕ, ꡔ동물생성론ꡕ, ꡔ동물보행론ꡕ); 인간의 실재적 본성과 영혼의 자기개념화의 실재적 본성 (ꡔ영혼론ꡕ)

n.3.3 수학 수학적 대상의 개념화. 예를 들어, 즉 산수 (게라사의 니코마코스에 의한 ꡔ산수 입문ꡕ), 순수 기하학 (유클리드의 ꡔ요소ꡕ), 천문학적 기하학 (ꡔ프톨레마이오스의 ꡔ알마게스크ꡕ), 음악적 음율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ꡔ조화론ꡕ) 그리고 광학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ꡔ광학ꡕ)

n.3.4 형이상학

n.3.4.1 (A. 보편 학문: 1. 그러한 것으로 존재자) 신적 대상의 개념화. 예를 들어, 그러한 것으로 절대적 존재자의 제일 원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의 논리상 필연의 속성에 관한 지식, 가능태, 현실태, 제일 원리, 원인, 실체, 우유, 류, 종, 반대, 유사성, 적합성, 부적합성, 단일성 그리고 다양성과 같은 것.

n.3.4.2 (A. 보편 학문: 2. 제일 철학) 이론적 학문-즉, 수학, 자연학 그리고 논리학-의 제일 원리를 설립하는 것은 형이상학에 관한 학문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음.

n.3.4.3 (B. 신학: 3. 자연 신학) 제일 창조자와 제일 창조물 그리고 보편적 영혼을 설정; 창조가 일어나는 방식; 창조자에 의한 지성의 순위, 지성에 영혼의 순위, 달 아래 질료의 순위와 영혼의 형성의 순위와 질료와 형상에서 생성된 존재자와 구체 그리고 별의 순위;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앞서는 것과 뒤의 것 가운데 순전한 발산.

n.3.4.4 (B. 신학: 4. 이성적 영혼의 형이상학) 신적 지배와 우주의 본성, 제일 일자의 섭리와 예언적 계시, 성스러운 그리고 고귀한 정신과 초월적 천사에 관한 지식; 다신론과 창조자에 관한 신인동형론을 거부하는 이론의 실재적 의미의 달성함; 덕있는 것을 준비하는 보답과 악행자를 위한 벌에 관한  지식, 육체로부터 그들의 분리 이후에 영혼에 일어나는 즐거움과 고통에 관한 지식의 달성.


n.4 〔이성적 영혼 가운데 일어나는 가지적인 것 가운데 두 번째의 또 다른 측면〕일부 사람 가운데, 마음의 열심 그리고 보편적 지성과의 접촉은 이성적 기능이 취득된 지식에 의한 추론과 추리로 부터 그것을 자유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영감과 계시는 그것을 위하여 충분히 지속된 것이다. 이성적 기능의 이 특별한 속성은 성스러운 정신이라 불리어지는 것에 의하여 신성화라고 불린다. 어떤 것도 신의 예언, 천사, 평화와 그들에 의존하는 기도자들을 제외 된 이 순위의 즐김을 얻지 못한다.     



<딸림 자료 ٢>


2.『구원』에서 발췌17)


n.1 필연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에 관한 것의 설명


n.1.1 실존의 필연성은 불가능성의 일어남 없이 비-실존이 가정되어질 수 없는 실존이다. 실존의 가능성은 불가능성의 일어남 없이 실존과 비-실존이 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존의 필연성은 실존을 포함한다. 실존의 가능성은 실존 혹은 그것의 부재의 어떤 종류의 어떠한 수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실존의 가능성에 의한 논의 가운데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가능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의미되어지는 ‘실존의 가능성’에 의해서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 마치 『치료』(al-shifā')의 논리학18)에 관한 부분에서 자세하게 주어졌듯이 말이다.)

n.1.2 이어서, 실존의 필연성은 그 자체로 필연적이거나 그 자체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거나이다. 실존에서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은 그 자체와 관련되며, 다른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즉 그 부재의 가정으로부터 불가능성이 귀결되어지는 그러한 것이다. 한편, 그 자체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은 것은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이 요구되어지는 한에서 실존의 필연성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예를 들어, 4는 그 자체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다. 그러나 2+2를 가정함으로 필연적이다. 불탐은 그 자체로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수동적인 능력과 함께 능동적인 능력의 가정에 의하여 필연적이다. 나는 타지는 어떤 것과 타는 것의 만남이라 여긴다.


n.2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은 다른 것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다. 다른 것에 의하여 필연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이다.


n.2.1 하나의 대상이 그 자체에 의하여 그리고 동시에 다른 것에 의하여 실존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가피하게 만일 다른 대상이 제거되거나 그것의 실존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실존의 필연성은 영향 받지 않고 그것의 실존의 필연성이 다른 것에 의한 것이고, 혹은 그것의 실존의 필연성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그 실존의 필연성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n.2.2 다른 것에 의한 실존의 필연성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실존의 가능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한 실존의 필연성인 것의 실존의 필연성은 어떤 연관이나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관과 관계에 관한 심사숙고는 그 연관과 관계를 가지는 대상 그 자체에 관한 심사숙고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존의 필연성은 이러한 연관에 관한 심사숙고에 의하여 단지 놓여진다. 그렇게 대상 그 자체에 관한 심사숙고는 단지 실존의 필연성을 수반하거나 실존의 가능성 혹은 실존의 불가능성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존의 불가능성을 수반해야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한 모든 것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의해서도 그렇다.



<딸림 자료 ۳>


3.『치료』「형이상학」에서 발췌19)


n.1 실존의 필연성이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만일 실존의 필연성이 그것의 실존을 위한 원인을 가진다면, 그것의 실존은 그 원인에 의하여 있게 된다. 그러나 데상의 실존이 어떤 것에 의하여 있는 것은 언제나, 만일 그것이 다른 대상 없이 그 자체에 의하여 고려되어진다면, 실존은 그것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다. 그리고 한 대상이 다른 것이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어지고 실존은 그것에 의하여 필연적이지 않을 때면, 언제나, 그것은 그 자체로 실존의 필연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실존의 필연성이 그 자체로 원인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실존의 필연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실존의 필연성은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n.2 이로부터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실존의 필연성이며, 다른 것에 의하여 실존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존이 다른 것에 의하여 필연적이라면, 그것이 다른 것 없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이 없이 실존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때마다 그것은 그것의 실존은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일 그 자체로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부터의 필연화는 그것의 실존에 어떤 결과를 가지지 않았다. 한편, 다른 대상은 그것의 실존 가운데 한 대상에 결과를 가질 때, 그것의 실존은 그 자체로 필연적이다.

n.3 그 자체로 고려되어지는 어떤 것이 실존의 가능성일 때마다, 그것의 실존과 그것의 비-실존은 원인에 의하여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실존하다면, 실존은 비-실존과 구분되는 가운데 그것을 야기했고, 만일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비-실존은 실존과 구분되는 가운데 그것을 야기했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가 아닌 것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있다면, 이 다른 대상은 원인이다. 한편 만일 그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실존의 필연성이다. 우리가 가정했듯이 그 자체로 실존의 가능성이 아니다. 실존하지 않았거나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수용되어지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비-실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 이재경, 「아랍철학자 아비첸나와 지향성이론」『서양고전학연구』23 (2005), 177-205; M.Fakhry, Averroes, Aquinas and the Rediscovery of Aristotle in Westerm Europe (Washington, D.C:Center for Muslim-Christian Understanding, 1997). 또한 아비첸나의 철학에 간략한 요약은 다음을 참고하라. S.Inati, "Ibn Sina" In History of Islamic Philosophy Part 1, ed. S.Nasr et al. (London:Routledge, 1996), 231-246; De Boer, The History of Philosophy in Islam, trans. E.Jones (New York:Dover Publications, 1967), 131-148; M.Sheikh, Islamic Philosophy (London:The Octagon Press, 1982), 67-84.


2) D.Gutas, 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Tradition (Leiden:Brill, 1988). 구타스가 소개하는 아비첸나의 여러 영어번역은 본 논의에 밑그림을 제시해 주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논 논의는 구타스의 위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며, 상당 부분 의존함도 고백한다.


3) G.Hourani, "Ibn Sina on Necessary and Possible Existence" The Philosophical Forum 4 (1972), 74-86; 이곳에 우리는 아비첸나의 필연적 존재와 가능적 존재의 그림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아비첸나 글에 관한 다양한 영어 번역을 읽을 수 있다.


4) ed. F. Rahman, Avicenna's De Anima, Being the Psychological Part of Kitab al-Shifa (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9). 238.


5) 딸림 자료  ١ n.3.4.3-4 참조.


6) 딸림 자료  ١ n.3.2 참조.


7) 딸림 자료  ١ n.1


8) S.Inati, "Ibn Sina", 238-239.


9)  F. Rahman, Avicenna's De Anima, Being the Psychological Part of Kitab al-Shifa, 238.


10) D.Gutas, 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Tradition, 74.


11) S.Inati, "Ibn Sina", 240.


12) Al-Kindi, Al-Kindi's Metaphysics, trans. A.Ivry (New York: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74), 55.


13)  D.Gutas, 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Tradition, 263.


14) Avicenna, Avicenna on Theology trans. A.Arberry(Westport:Hyperion Press,1979), 25.


15) 딸림 자료 ٢와 ۳를 참조하라.


16) S.Landauer, "Die Psychologie des Ibn Sina" ZDMG 29 (1875), 335-418. 이곳에서 란다우어는 독일어 번역과 아랍어를 편집하여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필자가 사용한 것은 영어 번역으로 이는 다음의 것에 수록된 것이다. D.Gutas, 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Tradition, 16-19.


17) Ibn Sina, al-Najāt, ed. M.Kurdī, 2nd ed. (Cairo, 1938), 224-225. 이에 관한 완벽한 라틴어 번역은 『아비첸나 형이상학 요강』(Avicennae metaphysices compendium)으로 알려졌다. 이곳의 번역은 호라니의 아래 영어 역본을 원본으로 사용하였다. G.Hourani, "Ibn Sina on Necessary and Possible Existence", 78-79. 호라니는 al-Najāt를 라틴어 역본의 제목에 충실하여『형이상학에 관한 두 번째 논구』라고 하였으나. 필자는 이를 아랍어에 따라서 『구원』이라 한다.


18) 『구원』에선 논리학 부분이 없다. 이는 『치료』의 논리학 부분(Manṭiq)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논리학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의 각 부분에 관한 아비첸나의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19) Ibn Sina, al-Shifā: al-Ilāhiyyāt, ed.G.Anawati et al. (Cairo:1960). 이에 관한 영어 번역은 다음의 것이 있다. ed. A. Hyman & J.Walsh, Philosophy in the Middle Ages 2ed edition (Indianapoliss:Hackett Publishing Company, 1973), 241-255 그러나 호라니의 것에 더욱 더 의존하여 번역하였다. G.Hourani, "Ibn Sina on Necessary and Possible Existence",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