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칠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5-11-16 10:48:30
- 수정 2015-11-16 10:52:20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했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기적의 능력을 가졌다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행할 뿐,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잔혹한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부유함과 권력을 얻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 지배하는 권세의 기적보다 낮은 곳의 아픔을 안아주는 치유의 기적을 보였다. 예수는 많이 배우지 않았다. 명문 학교를 나온 이도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수재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간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으로 있을 뿐이었다.
지상에서의 시작도 가난했다. 죽도록 일해도 결국 죽어 고기가 될 가축의 옆에서, 그 독한 냄새로 가득한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처음 누웠다는 말구유도 초라하기만 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한다면, 가축의 밥그릇, 어찌 보면 우리네 개밥그릇 같은 곳이다. 궁전도 대성전도 아니다. 지상에서 그의 시작은 이토록 가난했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장 불쌍한 존재들, 그 존재가 비참인 가축의 옆에서 태어났다. 신의 아들, 성자 예수는 그렇게 가난한 부모와 함께 가난한 삶을 살았다. 흔히 생각하는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그런 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힘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런 우리네 이웃이었다.
예수는 그냥 인간의 몸으로 온 하느님이 아니다. 가난한 이의 몸으로 온 하느님이다. 가난한 인간의 몸을 가졌기에 가난의 아픔을 함께 느꼈다. 배고픔의 쓰린 아픔, 병든 이의 외로운 아픔을 알았다. 오직 자기 욕심뿐인 정치권력에 의한 민중의 아픔을 알았고, 썩은 종교 권력의 부패함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알았다. 그냥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 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몸으로 이 땅에 온 신의 아들 예수는 가난한 이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그 가난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며 살았다.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알 수 있었다. 예수에게 이러한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다. 자신의 아픔이고 자기 가족의 아픔이며, 자기 이웃의 아픔이다. 가난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땅 모든 이의 아픔은 그저 남의 아픔이 아니다. 바로 예수 자신의 아픔이다. 자신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창녀를 더럽다 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보았다. 잘못과 나쁨이 아닌 그 아픔을 보았다. 잘못과 나쁨이란 이 사회의 복잡하고 잔혹한 구조에서 만들어진 폭력일 때도 있다. 가난하고 나약한 이를 궁지에 몰아 놓아 일어난 것일 때도 있다. 그렇기에 예수는 사회의 탓일지 모르는 그 잘못과 나쁨을 보기보다 아픔을 보았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은 그 외로운 아픔을 보았다. 돌림병에 고통스런 이에게서도 무엇보다 먼저 그 외로운 아픔을 보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이의 앞에서 그 부족함이 아닌 그 아픔을 보았다. 예수는 그렇게 아픔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픔을 안아주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된다. 그냥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아픔이 된다. 자신이 바로 그 아픔이 된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제 가난한 이의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아픔이 되었다. 너무나 사랑한 인간의 아픔이 하느님의 아픔이 되었다.
가난한 몸으로 태어난 예수는 돈이 없어 치유를 받지 못해 죽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느끼게 된다. 사회적 가난으로 만들어진 외면 속에서 처절하게 혼자가 되어 죽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느끼게 된다. 돈 없어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느끼게 된다. 가난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예수는 가난한 이의 이러한 아픔을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느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한 인간의 아픔이 그렇게 그의 아픔이 되었다. 그렇게 가난으로 하나가 되었다.
가진 자는 모른다. 가진 자는 예수와 같이 알 수 없다. 가진 자에게 가난한 이의 아픔은 그저 남의 아픔일 뿐이다. 알 생각도 없고 볼 생각도 없다. 그냥 남의 일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역사에도 있다. 일제 시대를 보자. 반민족, 반국가의 삶을 살아간 이들, 일본에 충성을 다하며 살아온 충일파를 보자. 그들은 가진 자다. 경제적 부유함도 사회적 부유함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일제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다. 오히려 고마운 시대다. 자신들을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어준 시대이니 말이다. 딸이 위안부로 끌려갈 아픔은 없었다. 그저 가난한 이들의 몫이다. 가진 자에겐 그저 남의 일이다.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남의 나라 전쟁에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아픔도 그저 남의 일이다. 자신의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위안부와 징병의 아픔은 그저 남의 일이다. 자신들에겐 오히려 일제 시대가 더 많은 것을 가질 기회이며, 그저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니 가난한 이의 고통과 아픔은 그저 남의 일이다. 자신에겐 그저 기쁨의 시간일 뿐이다.
예수는 가진 자의 자녀로 태어나지 않았다. 가난한 이의 자녀로 태어났다. 가진 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수많은 아픔으로 아파하며 살았다. 예수에게 가난한 이의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안았다. 예수는 가난한 이의 아픔을 너무나 사랑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와 가난한 이의 아픔으로 살아간 이다.
그 사랑이 너무나 깊어 자신에게 다섯 상처, 예수의 오상(五傷)으로 남았다. 그리고 십자가로 남았다. 예수는 자신의 기적을 스스로를 위해 쓰지 않았다.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남겼다. 그의 기적은 이 땅의 아픔을 위해 사용될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 세상 가득한 그 아픔의 원죄를 위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해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땅 가득한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런 예수를 너무나 사랑하는 이는 그 다섯 상처와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받는다. 인간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드린 예수를 너무나 사랑한 이는 그 예수의 몸에 새겨진 인간의 아픔을 향한 사랑의 상처를 자신으로도 받아드린다. 성 프란치스코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오상’이 생각난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는 성서로 이야기한다.
“나를 따르려는 이는 누구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마태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함이다. 쉽지 않은 말이다. 어려운 말이고 두려운 말이다. 이리 살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이러할까?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신앙, 자신의 수도 생활이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 말이다.
성탄절, 우리는 성당과 교회에서 예쁜 성탄 기념물들과 예쁘게 꾸며진 예수 탄생의 모습을 보려 한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달랐다. 화려함이 아닌 성탄,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온 그 힘겨움과 아픔을 보려 했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이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성 프란치스코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기억하려 했습니다. 아기가 겪고 있는 그 불편함을 보려 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말구유에 누웠는지 보려했습니다. 소와 나귀와 같은 가축들을 곁에 두고 어찌 짚북더기에 누워 있었는지 눈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1 첼> 30, 84)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왕과 같이 그리고 권세를 누리는 거짓 종교 지도자와 같이 높은 곳에 올라 화려하게 치장한 예수가 아닌 가난하고 힘겨운 예수를 보려 했다. 가난, 그것이 예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몸으로 이 땅에 온 예수, 그것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짓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예수, 그 가난의 모습으로 예수를 보려 했다. 하지만 그 가난은 그저 없는 가난이 아니다. 그저 버리는 가난이 아니다. 그 가난은 가난한 이를 향한 공유로의 가난이다. 가난하기 위해 그저 소유한 것을 버리는 그런 가난, 버림의 가난이 아닌 공유의 가난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되새겼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갈라 5, 24)
육체에 속한 욕심들은 자신의 것을 풍유롭게 하려는 욕구들이다. 소유를 향한 욕구들이다. 남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지 않고, 그저 자신만을 보는 욕구들이다. 남의 아픔을 보지 않는 그러한 욕구들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은 남의 아픔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죽인 이들이다. 오직 타인의 아픔이 너무 아파서 그 아픔과 하나 되어 자신을 내어 놓은 이들이다.
자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놓고 가난한 이들과 소유한 것을 공유하며 그 아픔도 공유하는 이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들이다. 십자가에 스스로를 못 박은 이들의 영혼에 예수의 오상이 남겨짐은 당연하다. 비록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고 실천하며 예수의 아픔도 오로지 자신의 아픔이 된 이는 기적의 힘으로 눈에 보이는 오상이 몸에 새겨진다. 그러나 우리네 삶 그리고 우리네 영혼에도 예수의 오상이 새겨질 수 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에 자신의 삶을 못 박은 이들에게 육체의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 영혼에 예수의 오상이 새겨질지 모른다.
성 프란치스코가 생각한 신앙의 길이며 수도자의 삶이란 것은 성서의 세 구절로 읽을 수 있다.
첫째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마태 19,21)
둘째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루가 9,3)
세째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 16,21)
보다 더 완전한 사람, 즉 영혼에 예수의 오상이 새겨진 이가 되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는 우선 자신 소유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 한다.(마태 19,21) 성 프란치스코가 생각한 가난은 그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버림의 가난이 아니다. 나눔이다. 공유의 가난이다. 이를 위해 아픔을 안아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첫 번째 시작이다. 이어서 성 프란치스코는 아무 것도 지나지 않은 신앙을 이야기한다.(루가 9,3)
하느님은 이 세상을 누구의 소유물로 만들지 않았다. 이 우주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우린 그저 이 우주 만물의 소유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잠시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그 사용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여 소유욕이 생기면,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 가진 자가 되면 인간의 타락하게 된다. 그 가진 곳에 집착하게 된다. 놓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일을 해서든 그것을 지키려 한다. 여기에서 폭력이 시작되고 사회적 악이 시작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를 거부한다. 그저 아무 것 없이 하느님의 창조물이 이 세상에 나와 하느님에게도 돌아가는 가난한 순례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리 산다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이가 된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의 영혼에 오상이 새겨질지 모른다.
만일 일제 강점기, 예수가 이 땅에 왔다면, 그는 일본의 폭력 앞에 쓰러지는 이 땅의 수많은 민중의 아픔의 편에서 그들의 몸으로 이 땅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 왔다면,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죽어간 세월호의 슬픔이란 사회적 아픔의 편에서, 힘든 자본주의의 폭압 속에서 생존권을 외치며 싸우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아픔의 편에서, 그들의 몸으로 이 땅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위안부 할머님의 아픔과 세월호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의 아픔을 남이 아닌 자신의 아픔으로 안고 그들이 되어 울었을 것이다. 고개 돌리고 앉아 정권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욕심을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아니니 말이다.
예수가 이 땅에 왔다면, 스스로를 버리고 가장 낮은 곳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힘든 이들의 눈물이란 몸으로 태어나 그들의 아픔을 위로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성 프란치스코는 말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공유하라고 말이다. 그 공유의 가난, 버림의 가난도 소유를 향한 광기도 아닌 공유의 가난을 이야기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님의 아픔이 외롭지 않게 하라 할 것이다. 바쁘다고 돌아보지 않는 이에게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보고 아픈 이의 아픔을 보지 않는 이에게 분노하여 그들에게 예수의 삶이란 없다고 외쳤을 것이다. 세월호와 이 땅 수많은 노동자들의 아픔이 외롭지 않게 함께 하라 할 것이다. 권력 없이 부유함도 없이 가난하고 약하여 울고 있는 그 슬픈 분노 앞에 자신을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살라고 분노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를 움직인 자신의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도 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것만을 챙기며 타인의 아픔에 눈감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이득만을 생각하다고 타인의 아픔과 가난의 고통을 향하여 어떤 공유의 가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이기적이다. 십자가는 멀기만 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신앙이니 예수의 오상은 있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에게 예수의 오상은 새겨져있을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고 있을까? 부끄럽다. 이 사회 여전히 가득한 가난한 이들의 아픔, 경제적 가난으로! 사회적 가난으로! 정신적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수많은 아픔, 이 아픔을 공유하고 있을까? 이기심에 타인의 아픔은 모른 척 고개 돌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기심은 여전히 가난한 이의 몸으로 온 예수의 삶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온 예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여 우리와 함께 한 그 예수의 사랑 앞에서 우린 당당할 수 있을까? 부끄럽기만 하다. 여전히 이기적이다. 십자가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가난한 이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손! 가난한 이의 아픔을 위해 실천하지 않은 발! 가난한 이의 아픔을 위해 힘을 내지 않은 내 옆구리! 오상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공유의 가난은 멀기만 하다. 소유의 아집으로 가득할 뿐이다.
부끄럽다. 참으로 부끄럽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다. 가난한 이의 몸으로 온 예수의 그 사랑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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