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칠
- 기사등록 2015-08-21 16:18:36
- 수정 2015-08-21 16:19:21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였듯이 여러분도 서로를 사랑하세요.” 예수의 부탁이다. 정말 어렵다. 우린 이유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유를 찾는다. 만족시킬 외모나 돈 아니면 권력이나 지식 어느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움직인다.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유 없이 사랑했다. 어떤 유익도 없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했다. 우리도 우리를 예수와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가 우릴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고개 돌리며 내 일이 아니라고 했을까? 가난한 장애인의 죽음 앞에서 내 일이 아니라 했을까?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고개 돌렸을까? KTX 해직 여승무원의 죽음 앞에서 내게 무슨 소용이냐며 고개 돌렸을까?
콜트 기타의 오랜 아픔을 두고 마치 아무 일 없는듯이 고개 돌렸을까? 위안부 할머님의 고통스런 삶 앞에서 그저 옛날이라며 고개 돌리고 앉았을까? 정말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아프고 힘든 이들의 고통 앞에서 고개 돌리고 앉아 하느님을 경배한다며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는 것이 참된 사랑일까? 가난한 이의 그 아픈 고통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으로 예수의 그 부탁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느님을 위한다며 교세를 드높이기 위해 세상의 고통에 귀 닫고 오히려 번영만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정말 그러한 것일까? 나는 깊은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수의 사랑은 대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사랑해서 사랑했다. 다른 이유가 없다. 예수는 가난한 이의 아픔 앞에서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냥 사랑했다. 만일 예수가 무엇인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랑 했다면, 그도 그저 초능력을 가진 욕심에 찬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상상해보자. 열두 제자가 사람들에게 돈을 가져오면 병을 고쳐준다 소리치고 다닌다 상상해보자. 그리고 예수는 돈을 가져온 이들의 값만큼 그 병을 고쳐준다고 상상해보자. 8억이면 간질을 치유하고 10억이면 말기암을 치유한다는 식으로 광고하고 다니는 제자들과 그 돈 값에 치유하는 예수를 상상해보자. 가난한 이는 돈이 없어 예수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예수에게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 자신의 권력과 소유욕만을 따를 뿐이다. 어쩌면 그저 자신의 욕심을 위한 사업가 혹은 장사꾼이다. 그에게 사랑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진정 그러지 않았다.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이며, 그들의 아픔 앞에서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사랑했다.
소록도의 마리안느 수녀님과 마가렛 수녀님이 떠오른다. 20대에 가난한 이국(異國)의 나라, 그 가운데 가장 형편이 어려운 한센병 환자들의 곁에 왔다. 그리고 70대까지 온 평생을 아프고 힘든 이들과 자신들의 삶을 나누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늙은 몸이 되자 오히려 짐이 될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예수의 사랑이 이 두 분 수녀님에게서 보인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국의 땅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아픔은 뒤로 한 채, 사랑의 삶을 살았다. 의사(醫師)의 편한 삶을 마다하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장기려 박사님도 그렇다. 어쩌면 편하고 부유한 의사의 삶을 마다하고 가난한 이들의 병을 돌보며 살았다. 삶의 마지막까지 옥탑 방에 행려병자를 치료하였다.
이들 모두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앞에서 어떤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했다. 예수가 우리를 그리 사랑하였듯이 이분들도 그저 그렇게 사랑했다. 예수의 그 힘든 부탁을 그들은 온 삶으로 살아갔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칭송을 받고 섬김을 받을 일이라 광고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 헌신의 사랑을 마치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 듯이 사랑하였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의 그 부탁 앞에서 당당한가? 부끄럽다. 먼 나라의 록밴드 스콜피온스가 공유한 콜트 기타 해고 노동자의 아픔을 우린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우리 사랑은 게으르기만 했다. “빚만 남기고 떠나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긴 KTX 해직 여승무원와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우리 사랑은 게으리기만 했다. 나 한 사람의 사랑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핑계 같은 계산을 하고 돌아서 버렸다.
작은 것 하나 공유하기 어려워하면서 예수의 부탁을 어찌 지킨단 말인가? 나의 것, 나만의 것을 위해 살면서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삶이라 생각하면서 예수의 부탁을 어찌 지킨단 말인가? 정말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부끄럽기만 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분노가 생각난다. 그는 다시금 부탁한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라고 말이다. 참된 사랑은 대상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대상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누리려 하지 않는다. 참된 사랑은 그 자체를 향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끼고 애착한다. 그것에 만족한다. 이용하고 사용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향유함(frui)이지 대상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함(uti)이 아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윤리학의 기본이다. 그는 그렇게 사랑하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수감되어 있는 많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성물마저 쪼개 녹여 이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었다.” (포시디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24장)
아우구스티누스는 수감되어 있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교회의 성물마저 쪼개여 나누어 사용하였다. 그에게 그 물건들은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가난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재산이나 물건이 아니었다. 세월호의 아픔, 해고 노동자의 아픔, 이 땅의 그 수많은 아픔 앞에서 신앙을 가진 이가 사랑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픔이다. 그 아픔 앞에 교회가 가진 것을 사용해야 한다.
교회가 소유한 것은 사용하라 준 것일 뿐이다. 교회의 소유물은 사용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진정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과 가난한 이이다. 이를 위해 가진 것을 사용해야 한다. 예수의 부탁, 그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랬다. 그는 가난한 이를 위해 교회의 소유물마저 나누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실천하라 한다. 삶으로 사랑 가득한 신앙을 보이라 한다. 입으로만 그리스도교인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으로 그리스도교인임을 보이라 한다. 실천 없는 신앙이란 실재가 없는 신앙일 뿐이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란 것을 드러내세요. 그대가 행동으로 그리스도교인이란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모든 이들이 그대를 그리스도교이라 부른다하여도 그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요? 실재가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요한 서간 강해> 다섯째 강해 12절)
진짜 그리스도인, 삶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처음은 사랑이다. 예수가 보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감이다. 어떤 이익도 소용도 유익도 없지만, 그저 사랑이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자 어디 한번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볼까요? 그대가 아직 힘든 형제를 위해 생명을 내어줄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 그대가 가진 소유물 어느 정도를 그 형제에게 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그대 가운데 사랑이 그대의 맘을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 공유함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올라오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이지요... 만일 그대가 이 세상에서 얻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눔의 삶이 자신의 삶에 과연 무슨 소용인지 의문이 생기는가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 괴롭고 아파해도 돈을 내어 주는 것이 많이 망설여지나요? 혹시나 그대의 맘이 이런 의문이 들어 망설인다면, 하느님이 그대의 마음속에 머물지 않으시며, 그대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가 아닙니다." (<요한 서간 강해> 5강해 12절)
가난한 이의 아픔 앞에서 나눔이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 계산하는 자, 나눔의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자, 이들은 참 신앙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신했다. 한마디로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자,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이가 아니다. 하느님이 그 안에 머무르는 이도 아니다. 신앙인이 아니다. 말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 즉 가짜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였듯이 그렇게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라는 그 예수의 청을 따르지 않는 자라면, 그는 신앙인이 아니다. 가난한 이의 아픔 앞에서 설사 목숨을 내어주지 못한다 하여도 조금도 나누지 못하는 자, 자기 소유욕만으로 가득한 자, 이런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신했다.
엄밀하게 신앙인에게 나눔의 선행(善行)이란 칭송받을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우주의 소유주는 우리가 아니다. 유일한 참 소유주인 하느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준 것일 뿐이다. 하느님은 이 우주를 누군가의 것으로 창조하지 않았다. 공유하도록 창조하였다. 그러니 하느님이 공유하라 한 것은 원래 창조한 그 원리에 따라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두란 말이다. 즉 제자리에 둠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공유란 제자리에 둠이다.
"하느님이 공유하라 하신 것은 하느님 당신의 것을 공유하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에게 무엇인가를 준다고 그것이 자신의 것으로 그리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교> Sermo L. 1, PL.38, 326)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둔다 하며, 이것이 칭찬을 들을 것은 아니다. 그냥 마땅히 해야할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긴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누군가가 더 많이 가져간다면, 마땅히 그것을 누려야할 이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부자들이 잉여의 자산을 만들며, 자신의 소유욕을 자랑하는 동안 누군가를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느님이 창조한 질서에 따라 우주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고통은 없다.
"당신은 왜 당신의 재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많은 것을 취하려 하는 건가요? 말해보세요. 분명 이러한 당신의 소유물들은 잉여(剩餘)의 것들입니다. 결국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그저 잉여의 자산으로 가지고 있게 되는 겁니다!" (<설교> Sermo LXI, 11, 12, PL 38, 413)
있어야 할 것에 두는 것, 자기 욕심만으로 남의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두는 것, 그렇게 자기만의 욕심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위해 공유하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다. 원래 우주는 그렇게 창조되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따라 살아감이다. 누군가를 이용하고 사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더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자리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것을 그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 공유함으로 서로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함이다. 사랑함으로 서로 나누고 살아간다고, 이를 자랑할 것도 아니고, 이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려 노력해서도 안 된다. 그냥 자연스러움에 따라 살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벗 혹은 남들을 다스리는 것을 마치 대단한 무엇인가로 생각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정신으론 그러한 것을 더 바라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 속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 듯 주장합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미움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자기 아래 있는 이들에겐 섬김 받기 바라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위에 있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불의한 인간이지요.”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 I권 XXIII, 23.)
섬김을 받기 위해 위선적으로 나누는 삶,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 미움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 이태석 신부님,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은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을 통해 어떤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대단한 것을 하렸으니 섬겨 달라 말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사랑으로 마땅히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있어야 할 곳에 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이”(h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이라 소개하며, 이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했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위해 필요하다면 교회의 소유물을 아끼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나누었다.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할 것을 두는 자연스러움,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라 확신했다.
사랑 앞에 망설이고, 공유 앞에 망설인다면, 아직 신앙인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언한다. 이 땅의 수많은 울음 앞에서 우린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쩌면 여유로이 삶을 즐기는 동안,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그 무엇인가를 앗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 익숙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것이 과연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21세기 대한민국의 예수는 비정규직, 세월호, 밀양 그리고 강정의 고통 앞에서 쓸모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돌릴까? 수많은 고통 앞에서 나의 일이 아니라며 고개 돌리고 앉아 열심히 말로만 기도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 할까?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그러한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조건 없는 사랑, 이유 없는 나눔의 사랑을 신앙의 처음이라 했다.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부끄럽다. 아직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분노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예수의 부탁 앞에서 우린 작아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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