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살 것인가? 이것은 인간이란 짐승이 지구를 돌아다니며 시작한 질문일지 모른다. 이미 오래 전 종교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인간을 고민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내세가 있다면, 보다 더 좋은 내세로 가기 위해 현세는 어찌 살아야하는가? 고민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싯다르타는 처참한 인간을 보았다. 죽어지고 병나고 고통 속에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인간을 본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지만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허망한 그 삶을 보았다. 그 아픔 속 인간은 그 자체로 슬픔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인간이다 .
로마군에게 지배되며 자신의 딸들이 로마인들에게 창녀로 몸을 내어주는 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창녀를 로마인들에게 몸을 내어준 더러운 여인이라 욕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장면에서 예수는 인간의 아픈 슬픔을 보았을지 모른다. 일본인에게 지배되며 힘든 살을 살아가던 약한 나라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딸을 강제적으로 내어놓아야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 딸들은 평생을 숨어지내는 이들이 된다. 예수는 이들을 안아주며 눈물을 흘리고, 이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을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들의 눈물에 녹아든 인간의 허망한 욕심ㅇ르 뿌리부터 제거하기 위해 설법했을 것이다.
여인을 취해 얻는 기쁨은 무엇인가? 누군가의 아픔으로 얻은 기쁨은 무엇인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이 세상에 하나의 또 다른 고통을 만든 그의 기쁨은 무엇인가? 그런 기쁨은 그 기쁨의 수를 더해가면 더해갈 수록 더 많은 이들이 아파하게 될 것이다. 남의 아픔으로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그 자체로 ‘업’이 될 수 있다. 남의 고통을 그 댓가로 얻은 기쁨, 그 기쁨으로 이룬 삶은 그 자체로 얻보로 가득한 삶이며, 그 기쁨은 그 자체로 해결되지 않은 죄, 즉 ‘원죄’의 결실이다.
싯다르타는 그 기쁨을 욕심내는 것부터 제거되어야한다고 본다. 남의 아픔, 남의 기쁨, 남의 눈물, 남의 미소, 그 수많은 남들이 우주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기쁨이 어쩌면 그들이 아파하는 그 아픔의 원인일 수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싸다. 그 싼 한 잔에 피로를 녹이고, 책 읽음의 지친 나의 혀를 달랜다. 그러나 그 커피는 약한 나라 사람들의 고된 삶의 노력을 값싸게 강탈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들 나라에게 커피를 강탈하여 나는 싸게 마신다. 나에겐 그저 작은 기쁨이지만, 그 기쁨은 누군가의 노력에 대한 무시이며, 도적질이고, 미래 희망을 앗아가는 죄악의 결실이다. 과연 이러한 기쁨을 진정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나는 죄를 그렇게 지었다.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그저 작디작은 기쁨을 누렸는데, 그 기쁨도 그렇게 죄가 되어 있다. 업보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슬프고 아프지만, 그렇게 살아왔다. 어찌보면 업보와 원죄로 가득한 삶일지 모른다.
소설 ‘등신불’이 생각난다. 스스로는 죄도 없지만, 자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모든 불행 앞에서 주인공 만적은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자기 존재 자체라 원죄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원죄 앞에서 그는 자신을 내어 놓는다. 그 실존적 고뇌가 느껴진다.
등신불의 주인공 만적과 같이 우린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죄악을 저지르고 수 많은 아픔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르고 너는 그르다. 이렇게 생각하며 소신으로 살아가도 죄악이 될 수 있다. 나만 바르고 나와 다른 그는 그 순간 바르지 않은 그른 것이 되어 버린다. 너는 스스로 바르다고 하고 날 그르다고 한다. 이 둘은 서로 적이 된다. 이렇게 소신을 가지고 사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 적을 만들고 서로를 논쟁하며 그 속에서 더욱 더 확고한 적이 되어 간다. 나는 이 종교도 너는 그 종교이니 너는 악마이고, 너를 사라져야 하고, 너는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잔혹한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하나의 생각 속에 가두는 것도 이렇게 죄악이 된다. 남을 악마나 지옥에 갈 불행한 존재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그 사악한 윈죄 속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등신불과 같이 자신의 몸을 바쳐 수행하며 모든 것으로 부터 진정 자유로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진정 이 진리를 날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그리 살지 못한다 해도,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아픔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욕심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 권력과 재물을 누리지 않아야 하며, 누군가의 아픔보다 나의 기쁨이 더 달다 여기지말하야 할 것이다. 나의 기쁨이 중요하듯이 나에게 너인 그도 그에겐 나이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나들이 모두 서로 기쁠 수는 없을까? 기쁨의 큰 웃음은 아니라도, 작디 작은 미소를 머금고 살 순 없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유대칠 적음
(토마스철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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