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시공사의 요청으로 적은 <중세>1의 리뷰입니다. 에스24 사이트에서도 확인 가능하십니다.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유대칠 소장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라서 우선 이곳에 올립니다.
<중세> 1, 현대의 모태 중세, 그 억울함을 풀다!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는 결코 이성(理性)이 잠들어버린 어둠의 시기가 아니었다. 광신에 빠진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마녀사냥과 화형을 즐기는 차디찬 겨울과 같은 시기도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관심 없이 초현실적인 것만으로 추구하며 살아간 시기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성과를 무시한 채, 그저 신앙만을 외친 시기도 아니었다. 이런 눈으로 중세를 본다면, 중세는 정말 억울하다. 만일 중세가 이러한 시기라면, 중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차디찬 어둠의 겨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세는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 중세는 현재의 모태(母胎)였다.
오히려 중세는 이성을 중시한 시기다. 수많은 근대의 결실은 사실 중세 이성의 씨앗에 결실이다. 씨앗 없는 결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중세의 이성은 근대 이성의 씨앗이다. 어느 시대가 그렇듯이 중세 역시 돌림병이 있었다. 하지만 돌림병만으로 중세를 이해해선 안 된다. 이미 중세 이슬람은 백내장과 두개골 절개 수술을 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중세에 말이다. 중세 유럽 역시 돌림병에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시대가 아니다. 병원을 세우기도하며 의학을 연구한 시기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중세 지중해 곳곳에선 종교를 넘어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할 것 없이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남긴 유산을 활용하고 연구하였다. 이들을 무시하고, 이들이 다시 인정받기 위해선 르네상스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억울한 누명이다. 오히려 중세는 서로의 결실을 인정하고 수용하였다. 이슬람을 야만이라 부르지 않았고, 신앙 없이 이성으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의 성과를 비신앙적이라 거절하지도 않았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성이란 공간에서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것이 중세다. 아비켄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 없이 중세 스콜라 철학은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을 수 없었다. 그들 없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철학이 그와 같을 수 없었고,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도 그와 같을 수 없었다. 중세 이슬람 철학자들은 <꾸란>만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에 근거하여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그 결실 위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일구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이슬람교뿐 아니라, 중세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중세는 고대의 유산을 무시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종교적 틀 속에서 있지도 않았다. 학위 제도를 가진 역사상 첫 대학은 중세 이슬람인에 의하여 세워진 알-카라윈 대학이다. 이슬람 신학을 연구한 이곳은 이슬람 사상의 대가들이 양성되기도 했지만, 오직 이슬람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1003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했던 실베스터 2세가 수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기 위해 선택한 곳도 바로 이곳 이슬람인에 의하여 세워진 대학 알-카라윈 대학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다. 중세는 이성적 결실을 위하여 다른 종교를 가진 이에게도 귀를 기울이고 제자가 되었다. 신앙을 수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성적 결실을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이처럼 이성에 기반 한 학구열을 불태우던 중세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시기라고 한다면 정말 억울하다. 그저 돌림병의 시기도 하고, 신앙의 가치 위에 모든 것을 무시하던 시기도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억울하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했다. 호위징아(J. Huizinga)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를 차디찬 겨울이 아닌 ‘가을’이라 했다. 질송(E. Gilson)은 중세철학 연구를 통해 중세의 합리성을 보여주었다. 드 리베라(A. De Libera)는 오직 서유럽 중신의 중세철학이 아닌 서유럽, 동유럽, 이슬람과 유대교 등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복수 화 된 중세철학‘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제법 많이 알려진 자끄 르 고프(Jacques Le Goff)는 중세를 암흑이 아닌 '위대한 천년'이라 규정하며, 중세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에 맞섰다. 중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각 개별 학자들은 자신들이 전공한 분야만을 중심으로 중세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뿐이다. 철학사를 전공한 이에게 의학사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중세 예술사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이에게 자연학과 수학에서의 억울함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중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노력은 다양했고, 나름의 결실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쉬운 한계가 있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를 중심으로 모인 다수의 중세 전문가들에 의하여 쓰인 <증세> 시리즈는 분명 매우 의미 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중세 전문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에 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소설 <장미의 이름>에선 중세 후기 철학자 ‘윌리엄 오캄’을 주인공인 윌리엄 신부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그런 에코를 중심으로 중세의 오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중세 정치학, 철학, 문학, 의학, 수학, 자연학 등 거의 모든 중세학의 분야를 아우르는 수많은 전문가에 의한 수 백 편의 글들로 각 분야에서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다. 단 한 명이 단 하나의 전공 분야를 중심으로 적은 그런 책과 다른 장점이다.
에코를 중심으로 모인 수많은 학자들이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하나의 집단 지성이 구성한 셈이다. 그 집단 지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작은 글들은 <중세> 시리즈 전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중세의 억울함을 풀어가고 있다. 이렇게 전체가 흘러가다 보니, 한 명의 학자가 평생을 걸고 집중하여도 이루기 힘든 깊이와 유려(流麗)한 설명들은 진정 <중세> 시리즈의 큰 장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작은 단위를 전체 속에 부분이지만, 그 단위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글의 형태를 가진다는 것도 장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중세 철학은 암흑기라는 억울함에 대한 글을 읽고 싶다면, 에코가 적은 중세 철학 일반에 대한 소개글을 읽어 보는 것이 좋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글이다. 하지만 더욱 더 구체적으로 에코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선 레나토 데 필리피스가 소개하는 보에티우스에 대한 글로 이어져 읽는 것도 좋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철학사에서 보에티우스뿐 아니라, 음악에서의 보에티우스가 고대와 중세를 매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체칠리아 판티가 소개하는 음악이론가 보에티우스에 대한 글로 흘러가면 된다. 또 더 근본적으로 고대와 중세의 매개로 보에티우스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면, 파트리치아 스토파치의 보에티우스에 대한 글을 읽으면 된다. 이와 같이 이렇게 굳이 처음부터 차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어느 한 부분을 잡고 읽기 시작해도 결국은 전체를 읽게 된다. 보에티우스 한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전문가의 다양한 설명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 즉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도 집단 지성을 구성하는 여러 단위의 설명을 통하여 조금은 입체적으로 접근하여 중세의 억울함을 풀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시리즈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또, 에코가 기획한 <중세>는 서유럽만의 중세가 아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세 이슬람과 중세 비잔틴의 성과가 중세 서유럽과 병행된다. 매우 입체적이다. 이제까지 <중세> 시리즈와 유사한 작업들은 대체로 서유럽의 중세만을 중세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476년에서 1000년을 다루는 <중세>1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1은 서로마제국이 패망한 476년부터 1000년까지 다양한 중세의 모습들을 소개한다. 이 시기 중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 시기 중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를 보는 것이다. 이 둘은 철저하게 합리적이며 동시에 신앙적이다. 흔히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중세 사상사의 대명제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교부들과 스콜라학자들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말이다. 우선 보에티우스를 보자. 그는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철저하게 수용한다. 심지어 그리스어로 된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이렇게 번역하고 연구함으로 얻은 고대의 유산에 대한 지식이란 이성의 수단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조금 더 온전히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즉,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와 신의 예지력(豫知力) 사이에 일어나는 논리적 모순에 대한 고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고민 앞에서 그냥 믿으라는 말은 하진 않는다. 비록 인간 이성으로 이 답을 완벽하게 구할 순 없지만, 최대한 이성을 활용하여 알아들으려 노력한다. 보에티우스는 이성의 독단과 신앙의 독선을 막기 위해 이렇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통하여 상생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광신이나 비합리는 그저 억울한 누명일 뿐이다.
보에티우스의 태도, 즉 고대의 수용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란 태도는 다른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자연 과학에서도 중세는 고대의 성과를 버리지 않았다. 책이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제의 용구에서도 중세는 고대와 무관하지 않았다. 음악에서도 이들은 고대의 성과를 무시하지 않았다. 보에티우스는 음악에 대한 고대의 피타고라스학자의 성과를 수용했다. 그리고 그 수용 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성과를 더함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이렇게 중세. 특히 476년 이후 초기의 중세는 고대와의 강한 단절보다는 연속성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더하려 하였다. 이 모든 과정들이 <중세>1은 음악, 철학, 문학, 제의 용구, 자연 과학 등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간결하면서 차분히 소개하고 있다.
<중세>1에서 다루어지는 476년 이후,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과거 박해의 시기를 보내던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국가 종교가 되었다. 다른 지위의 종교가 된 셈이다. 아랍 지방은 전에 없던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교가 등장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어갔다. 유럽은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구분되어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다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동일한 신앙이지만, 서로 다른 이성의 이해 방식에 따라 서서히 달라진다. 보에티우스 등에서 확인되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하나의 신앙이지만, 서로 다른 이해의 방식에 따라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 신학과 철학에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종교 예술에서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동유럽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유럽과 동유럽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구분이 이때 서서히 모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현대 유럽의 사상적 혹은 종교적 지형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고대 로마의 적통(嫡統)인 동유럽의 비잔틴제국가 있었고, 고대 로마인에게 야만인이 불리던 게르만족이 중심이 된 서유럽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다. 마찬가지로 유목민으로 사막 생활을 하던 이슬람 역시 문명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신학과 철학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476년 이후 1000년까지 지중해 연안 중세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슬람의 정체성, 661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암살사건으로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나눔이 일어난 이후, 지금도 유지되는 이슬람 내부의 다름과 같음의 정체성이 서서히 확립되어 간다. 즉 이슬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사상적 혹은 종교적 지형도를 드러내기 시작한 셈이다.
476년 이후 새로운 시대를 향한 노력들은 결국 현대 지중해 연안을 구성하는 여러 주체들의 정체성에 있어서 일종의 모태가 되었다. 유럽은 동서유럽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이해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였다. 같은 것도 있지만 서로 다르다. 이해의 방식이 다른 이 둘이 유럽에 공존하게 되었다. <중세>1 그리스도교의 도상 프로그램에서 우린 이 둘이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감을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와 수니파 역시 동일한 신앙에 대한 서로 다른 시야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유럽에서와 같이 이들도 이해 방식이 다른 둘이 아랍에 공존하게 되었다.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동서유럽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갈등, 그리고 이슬람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가 바로 이 때다. 476년 이후에서 1000년 사이다.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 초기인 476년에서 1000년을 걸치면서 서서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지중해 연안의 세계가 형성되어져갔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지중해 연안에 전체적으로 진행된 중세 초기의 일반적 모습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다. 서유럽과 동유럽이 같은 신앙에 서로 다른 이해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 이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현대 지중해 연안을 구성하는 여러 주체들에 있어 정체성의 모태가 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중세가 억울했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으로 5000만 명이 죽었다. 그러나 20세기를 돌림병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다. 근대도 역시 그렇다. 다른 종교와 인종이란 이유로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렇다고 근대를 광신이나 비합리성의 시대라 하지 않는다. 중세 역시 돌림병이 있고, 광신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세는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 억울하다. 화형! 그것 역시 억울하다. 그 유명한 브루노(Bruno)의 화형은 1600년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종교 재판 역시 근대다. 마녀 사냥과 관련된 안내서인 <마녀들의 망치>(Malleus Malefixrum)는 1486년 나왔다. 엄밀하게 중세가 아니다. 중세의 끝이다. 그런데 중세를 화형과 광신 그리고 비합리의 시대로 보았다. 중세는 억울했다. <중세> 시리즈는 이러한 억울함을 풀어줄 좋은 중세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 보인다. 특히 그 시작인 <중세> 1은 중세의 태동기이면서 동시에 서서히 현대의 지중해 연안의 모습이 만들어져가는 그 발아기의 지중해 연안을 확인하게 해 준다. 돌림병의 중세도 광신과 비합리의 중세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그 지중해 연안의 모습들이 탄생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서유럽, 동유럽, 이슬람교 등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그 출발점을 보여준다. 너무나 합리적이며 포용적인 중세에게 주어진 억울함을 풀어주고 우리의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중세> 1의 일독! 단순한 과거 지식을 넘어선 현실 삶의 지혜를 얻을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유대칠(오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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