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칠
- 기사등록 2015-05-05 11:45:12
- 수정 2015-05-31 12:07:55
아픔을 공유하고 소유를 공유하라! 그것이 신앙이다.
: 바실리우스 주교의 분노
벌써 수년 전부터다. '공정거래'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착취하듯 빼앗아 오지 말고, 제대로 값을 주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오랜 시간 당연하지 않았다. 어느새 지구인에게 커피는 일상이다. 엄청난 양의 커피가 소비된다. 그러나 커피를 생산하는 국가는 가난하기만 하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 하늘을 보면서 날씨도 확인해야 하고, 하나하나 직접 맨손으로 열심히 노동한다. 그 매일의 노력으로 고급 커피를 생산한다. 하지만 막상 거대한 자본의 힘 앞에 자신의 노동대가를 받기는커녕 그 결실을 빼앗긴다.
그래도 커피 이외 마땅히 할 것이 없기에 그들은 죽을힘으로 커피를 생산하고, 그 결실을 또 다시 도둑맞는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흔히 아무 일 없는 듯이 한 잔 마시는 커피도 그 잔혹한 도둑질의 결과물을 즐기는 것인지 모른다.
유명 회사의 값 비싼 커피도 결국 애써 힘쓴 노동자의 몫이 아닌 자본가의 몫일뿐일지 모른다.이것은 커피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사랑의 징표로 사용되는 다이아몬드 역시 상당수 반군의 전쟁 자금이었다. 과거 시에라리온 내전을 보자.
그때 인간병기가 되어 버린 소년병과 수많은 양민 학살 그리고 잔혹한 성폭행의 자금이 바로 그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라며 결혼식에서 빛을 내는 그 다이아몬드가 사실은 핏빛으로 빛나는 잔혹한 보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매일의 일상인 커피와 사랑의 징표인 다이아몬드를 소비함으로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잔혹한 악행에 참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잔혹한 자본주의 사회의 원죄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이러한 악행이 사회적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울음을 향하여 질투난다면, 너희도 강해지면 그만이라는 조롱이 사회적 상식이 되고 있다. 공정함, 모든 이들이 서로 행복을 공유함이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되고 있는 지금이다.
위대한 바실리우스(Magnus Basilius) 주교는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길이 남은 신앙심을 보여준다. 그의 할머니 마크리나(Macrina)와 아버지 바실리우스 그리고 순교자의 딸인 어머니 엠멜리아(Emmelia)는 모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이다.
그뿐인가, 그의 누나 마크리나와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그리고 세바스테의 페트루스(Petrus) 역시 모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이다. 일가족이 모두 성인품에 오른 그런 집안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또한 학식이 뛰어나 카이사레아에서 수사학 학장 제안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수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그 부유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바실리우스는 수도자의 삶을 산다. 나눔의 삶 이외 학문에도 깊은 업적을 남겼다.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며, 정통 교리를 바로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런 그에게 주어진 ‘위대한’(Magnus)이란 라틴어 형용사는 그와 동시대 살던 이들이 붙여 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형용사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스승이며 대학자인 '위대한 알베르투스'와 '위대한 교황 그레고리오' 정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바실리우스를 '위대한' 이로 불리게 하였을까?
그가 살던 시대는 대지주와 소작농에 함께 살던 시대다. 그 당시 소작농은 거주 이동이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했다. 그냥 말 그대로 빌린 땅에서 농사일을 할 뿐이지, 인간 그 자체가 종속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소작농에게 그런 자유는 없었다.
대지주에게서 자유롭지 못했고, 지주와 국가를 위해 때때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심지어 소작료를 받기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노동은 가난에서 노동자를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그들에게 노동은 그저 힘겨운 삶일 뿐이며, 희망이지 못했다.
조세는 점점 커지고, 인구는 감소하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경작이 힘들어지고, 수입이 줄어들자, 국가는 지주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었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편하게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토지를 더 주고, 그 땅의 조세를 책임지게 했다.
그러면서 그 땅에서 노동하는 소작농에 대한 지배권마저 주었다. 이제 지주의 악행은 더 심해졌다. 더 많은 수입을 위해 국가는 그 잔혹한 행위에 등을 돌렸다. 이것이 4세기 바실리우스가 살던 시대의 지중해연안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이랑 비슷하기도 하다. 자세한 내면은 다르지만, 노동자에 대한 대기업의 잔혹함과 고개 돌린 국가를 보면 비슷하기도 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법적으로 자유인이다. 그의 인권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 속 그들의 아픔은 잔혹하기만 하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려는 권력은 드물다. 4세기 소작농의 아픔은 이렇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실리우스는 부유한 이들을 향하여 분노하며 설교한다.
“부자는 이리 말한다. ‘내가 내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때,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냐? 한번 말해봐라!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너희들의 것이냐! 너는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단 말이냐!너희들은 마치 모든 것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극장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들이 부자들이다. 그들은 공유할 것을 가장 먼저 차지하였으니 당연히 자기의 소유라고 한다. 만일 부자들 개개인이 궁핍한 이들을 위해 남겨두었다면,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만 가져가도록 했다면, 누구도 가난하거나 부유하진 않을 것인데 말이다.” (PG.31 : 276)
바실리우스는 부자의 맘을 잘 알았다. 한때 그 자신도 부자였다. 사악한 부자는 아니지만,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다. 그렇게 주변 사람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이 잘못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부자들은 당당하다. 스스로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나눔의 삶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 소유에 앞선 공유의 가치를 모른다.
오히려 부정한다. 과도한 소유욕에서 나온 사회적 악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부러 우면 부자가 되라는 식이다. 과도한 욕심을 내지 않고, 남을 위해 남겨 두었다면,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에 일어난 사회적 충돌과 그로 인한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른다.그러면서 외친다. 무엇이 잘못이냐고 말이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였냐고 말이다.
“진정 너의 그 끝없는 탐욕으로 수많은 이들의 것을 앗아갔음에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탐욕인가! 스스로 만족한 만큼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지 않는 이들이다. 과연 누가 도둑놈인가! 바로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아간 이들이다!” (PG.32 “ 1158)
창조란 부자를 위해 이루어진 신의 봉사가 아니다. 창조로 만들어진 이 우주는 공유물이며, 각자의 삶 동안 잠시 소유하다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남의 몫까지 욕심을 내고 스스로의 소유욕으로 스스로의 탐욕에 찬 행복을 일구려 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어떨 수 없이 가난해야 한다. 누군가가 그의 몫까지 욕심을 내서 소유해 버렸으니 말이다. 과도한 욕심은 이 처럼 그 자체로 도둑질이다. 그뿐 아니라, 신이 남의 몫으로 마련한 것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네가 너무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났느냐? 의심할 것도 없다. 너는 너의 안락을 위해 안심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왔다. 그러니 네가 부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선에 대한 필요는 늘어난 셈이다.” (PG.31 : 281)
부자들이 안락함을 누릴수록 그들은 이 사회에 더 많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부자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어떤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서 다루어진다. 즉 정말 돈이 많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강한 소유욕을 내세울수록 사실 악행은 더 커지고, 그것에 대하여 죄 값으로 사회에 대한 선행의 의무는 더해져야 한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것이 사회적 의무이고 신앙의 의무다. 소유물이 많으면 많은 것으로 공유해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이를 구별하는 법은 쉽다. 부자는 생필품을 과도하게 소유하고 있으며, 자난한 이들은 생필품마저 부족하기 때문이다.” (PG.29 : 433)
“너의 것이라고 그렇게 모아둔 빵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네 옷장의 옷들도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네 소유물 가운데 썩어 사라지고 있는 신발들도 신발 없는 가난 한 이들의 것이다.” (PG.32 : 1158)
누군가는 의식주의 문제로 고민한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구분은 쉽다. 어느 것을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면, 부자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생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면 가난한 이들이다. 즉 누군가는 더 좋은 옷과 신발로 고민할 때, 누군가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한다. 생존의 고민 말이다.
이 고민의 시작은 가난한 이의 무능(無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부자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이며, 이러한 욕심은 신에 대한 도전 행위이며, 동시에 배교(背敎) 행위다.
“너는 어머니로부터 빈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냐!(욥 1:121) 그러면 네가 가진 모든 소유물은 도대체 어디에서 가져 온 것이냐? 만일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 한다면, 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네가 창조주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안다면, 너는 왜 그것을 받았는지 우리에게 말해봐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필요하신 것을 공정하지 않게 나누어준 정의롭지 않은 분이란 말이냐! 왜 너는 부유하고 저들은 가난하단 말이냐?” (PG.31 : 276)
공유는 신앙의 시작이다. 나눔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천국 가는 고급 열차가 아니다. 천국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신앙은 아니다. 바실리우스가 이야기한 신앙은 나눔과 공유가 한 몫을 한다.
그에게 신의 정의는 나눔이다. 신은 모든 것을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모든 것은 공유물이다.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것은 신을 거부함이다. 신앙 자체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다. 신의 뜻을 무시하는 셈이다.
참된 신앙은 가난한 이의 아픔을 공유해야 한다. 아픔의 공유는 우리가 가진 사랑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것이 신앙이다. 바실리우스는 외쳤다.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그런데 왜 그토록 집에 쌓아두고 지금 가난으로 죽어가는 이의 아픔에게서 고개 돌리느냐! 그것이 신앙이냐!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정말 신을 믿는다면, 신이 왜 너에게 그것을 소유하게 하였는지 생각해보라! 나누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바실리우스는 분노에 차 설교했다.
바실리우스가 그립다. “공유하자” “나누자” 외치는 그 신앙이 그립다.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힘든 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린다면, 그것이 종교인가? 진정한 종교는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다. 종교는 강자들이 이 현생에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미처 이루지 못한 욕심을 이젠 천상에서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현실의 고통을 공유라고 그 소유를 공유함이다. 나눔이다. 신은 누구의 몫으로만 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약자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그러한 세상을 만든 불의한 존재가 아니다.
바실리우스 주교가 그립다. 그 분노가 그립다. 참된 신앙의 공유다. 이것이 정말 이 땅에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이기만 한 것일까? 공정거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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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251'교부들의가르침(가톨릭프레스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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