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의 위상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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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론」에서 문제의 해결과 새로운 문제제기 -
그리스철학이 남긴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성, 그리고 영혼에 대한 이해 혹은
해석이다. 물론 이 중에 으뜸은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등장하는 이성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일 것이며, 이는 13세기 서양철학의 중요한
화제가 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철학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본 논문은 이렇듯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그리스철학에서의 영혼과 이성의 이해와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과정,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움 종합, 그리고 그에게서 또 다시 일어나는 해석의 문제와 그 해석의 다양한 흐름을 따라가며
다루고자 함이 본 논문의 기본적인 목적임을 전제해 둔다.
플라톤의 영혼관에서 등장하는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가의 어려움,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형상질료설이라는 기본적인 자신의 형이상학적 태도로서 극복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영혼론」에 등장하는 새로운 해결책과, 여기에서 또
다시 야기되는 이성이 모든 인간에게 단일의 것인가 아니면 개별인간에게 있는 개별의 이성인가의 문제를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아랍의 철학자와 주석가, 그리고 중세기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시저 브라방에 이르는 철학사를 개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상을 속속들이 살피기는 무리가 따르며 단지 그 주된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의 이해에 따른 철학적 영혼관의 문제해결과 또 다른 문제의 야기와 그 해결의 역사를 따라가며 영혼의 문제를 문제삼아보는
것이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선배들도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이성과 영혼의 관계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논하였다. 사실 영혼이나 이성이 물질적인 하나의 사물인가라는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의견과 그것을 하나의 비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영혼만을
참인간이라고 정의한 플라톤의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영혼이 육체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있게 하는 현실태이지만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마부와 마차와 같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방식은 그 후에도 인정을
받는다. 그는 이처럼 영혼에 대한 선대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선배들의 문제들을 나름으로 해결한다. 그에게 영혼은
물이나 불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직 영혼만이 참 인간도 아니었다. 또한 아낙사고라스처럼 이성이 영혼과 큰 구별이 없으며, 아울러 한 인간을
떠나 단지 세계를 설명하는 그런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영혼을 사고하고 성장하고 감각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운동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낙사고라스나 데모크리토스처럼 이성을 영혼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영혼의 능력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이성은 하나의
사고이며 이는 영혼의 능력이라 보았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는 선배철학자들의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욱 자세히 하기 위해 토마스의
의견을 들어보자. 그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전에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요소이거나 복합체라고 본 것을 비판하고 이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감각을 이성과 혼돈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를 분별하였다 하여도 플라톤과 같이 이를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커다란 문제들을 우리에게 제기하기도 한다. 과연 이성이 인간의 밖에 있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우리는 아베로에스를 비롯한 이들, 즉 이성을 인간의 외부에 실존하는 것으로 두려는 이들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이들, 즉 이성을 인간 영혼의 한 능력으로 두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한 부류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의 논의에 따라 그의 형이상학적인 이론에 따르기만 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단지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윤리적인, 그리고 행위적인
문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생각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듣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에게서부터 그리고 토마스와 시저 브라방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철학의 문제였다. 이 문제의 두 가지 해결 중 질송과
같이 시저 브라방과 아베로에스만을 잘못된 것(averroische symptom schlechthin)이라 부르는 것처럼 필자가 어느 하나만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다른 것은 이단이라고 말하기에는 필자 자신의 이해정도가 역부족이다. 심지어 현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문가들도 여러 의견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문가로 유명한 로스(D.Ross)는 수동이성은 죽음이후에 사멸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어찌 필자의 좁은 견해로 평가하겠는가. 다만 그의 저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들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필자가 이성을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분리실체라고 주장한 이들을 아베로에스주의, 혹은 이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하지 않고 단지 급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부른
까닭이다.
이들은 아베로에스의 주해가 가장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이해한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주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
등장하는 어려움을 단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은 분리되어 있을 때 참으로 존재한다고
한 것, 그리고 그의 책 여기 저기에 등장하는 이성에 대한 분리성을 단지 논리적으로 따라 간 것이다. 이성은 분리된 것이고, 이는 영혼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그러기에 분리된 실체라는 식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러한 해석의 어려움을 행위론적으로 다시 말해 행위의 주체를 논하는 식으로
다루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둘 다 문헌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공통의 근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이다.
이러하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권의 책에서 그 이전의 영혼에 대한 문제들, 즉 영혼과 이성의 관계와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새로이
풀이하였으나 이것으로 이 작은 책이 가지는 철학사적인 위상이 다한 것은 아니다. 이는 또 다시 이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 권의 책에 다루어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문장에 의한 것이기에 진정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엇을 의도하였는지는 진정 알기 어려운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이 가지는 철학사적인 진정한 위상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은 책이 철학사에 가지는 가장 큰 어려움이며
또한 그것이 다루어지는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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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당선소감
지난 인류의 지적 여정 돌아볼 때
생각이 없는 시대 그래서 철학이 사라진 시대...무엇을 생각하기 보다 그저 무엇을 느끼기 좋아하는 시대...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그저 고루한 옛 사람의 이름의 답답함으로만 전해지는 시대...난 이런 시대라서 더욱 더 고루한 그 옛 이야기를 하려
드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우리가 그토록 답답하고 고루하게 여긴 그 이야기 가운데 태어난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에 말이다.
우리는 이제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지난 일을 추억 할 때이고 지난 인류의 지적 여정을 돌아볼 때이다. 그것은
어떻게 지금에까지 왔는지 모르는 이는 지금을 모르는 이이고 또한 지금을 모르는 이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난 지금을 알기 위해 어쩌면 이토록
고루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상은 그러한 나의 길이 그저 잘못은 아님을 알려주는 기분 좋은 길동무로 여긴다. 그토록
험한 나의 갈 길에 힘내라고 응원하는 그런 길동무를 만난 것으로 여긴다. 진실로 감사함과 고마운 맘으로 말이다.
유대칠 <일반대학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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