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철학의자리

흄의 인과론과 전통 인과론자와 우인론자들

유학장 2005. 5. 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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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철학 학교 근대 철학 자료 2003.07

흄의 인과론과 전통 인과론자와 우인론자들

유대칠
(토마스 철학 학교)


1.0 흄(D.Hume)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인과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인과이론을 중세 우인론자인 알 가찰리와 근대 우인론자인 말브랑슈의 이론을 소개하고, 여기에서 흄으로의 이월을 확인할 것이다. 한편 전통적인 인과론에 관한 흄의 입장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역사적 소개를 통하여 보다 흄의 인과이론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서 흄에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흄의 인과론을 간단히 소개하고, 흄의 눈으로 그에 앞선 여타 인과론들과 우인론을 주장한 이들을 살필 것이다. 즉, 흄의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볼 것이다. 그러면 흄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우선 철학사에 관한 강의에서 흄을 배운 이라면, 누구나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2.0 흄이 이야기하는 인과론은 원인 없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어리석은 명제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특정의 사물이 반드시 특정의 원인을 가진다는 필연성을 논박하는 것이다.

 필연성은 이 관찰의 결과이며, 다름 아닌 정신의 내부 인상이며, 또는 우리의 사유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결정이다.

 여기에서 흄은 필연성을 단지 사유의 결정이라고 한다. 즉, 하나의 특정 원인이 하나의 특정 결과를 가져야한다는 필연성은 실제로 단지 사유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보다 쉬운 설명을 해보자. 당구공 하나가 다른 당구공에 부딪치면, 다른 하나가 움직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흔히 인과적 법칙을 발견하며, 이에 따른 인과성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런데 흄은 이러한 인과관념의 분석을 통하여 필연적 결합을 다룬다. 그리고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사실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향하여 움직이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 공이 다른 공을 움직이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순간 두 공의 충돌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아니기에 둘 사이의 필연적 결합을 관찰하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는 두 사물이나 사건에 인과성의 관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단지 추론 혹은 사고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다면, 흄이 필연성을 사고의 결정이라고 한 것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래 흄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추정이 필연적 연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 연관은 추정에 의존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한 흄의 논의를 이해한다면, 그 연장선에서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온다. 인간이 가진 관념이 필연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성이 인간의 사고에 의존하는 것은 흄에게 당연한 것이다. 물론 흄의 인과론은 더욱 더 복잡하다. 하지만 여기에선 이 정도로 정리하고, 그 이전의 학자들이 주장한 인과론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도록 하자.

3.0 우선 전통적인 스콜라철학적 인과론을 살펴보자. 이에 의하면,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인과론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불꽃은 왁스를 녹인다. 그것은 우선 불꽃에 왁스를 녹이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이 그렇게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자는 제2원인이고, 후자는 제1원인이다. 이러한 인과론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아베로에스(Averroes) 등에게서 보여진다. 그러면 간단하게 토마스의 제1원인과 제2원인을 정리해보자. 신(神)과 같은 제1원인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규정한다. 그리고 제2원인은 도구적 원인(causa instrumenti)과 원리적 원인(causa principii)이다. 여기에서 도구적 원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도구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구적 원인은 원리적 원인이 있어야한다. 여기에서 원리적 원인은 자기 성장과 실현, 자기 산출 그리고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의 목적에 따른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물은 자신의 제2원인에 의하여 움직이지만, 이것은 제1원인에 의하여 남김없이 규정된다. 마치 위의 불꽃의 예와 같이 말이다. 아베로에스 역시 태아(胎兒)의 생성에서 이러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설명을 보인다. 그는 태아의 생성은 두 가지 원인을 가진다고 한다. 그것은 1차적으로 신에 의한 것이고, 2차적으로는 자연적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전자는 제1원인이며, 후자는 제2원인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곧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우인론이 등장한다.

4.0 우인론은 제2원인을 배제한다. 그러한 이들로 중세는 오브레쿠르트의 니콜라스(Nicholas of Aurrecourt)와 이슬람의 알 가찰리(al-Ghazali)가 있으며, 근대에는 말브랑슈(Malebranche) 등이 있다. 이들은 제2원인을 배제함으로서 신에 의한 직접적 원인만을 주장하였다. 우선 두 명의 중세 우인론자들을 다루어보자. 오브레코르트의 니콜라스를 질송(E.Gilson)은 그의 철학사에서 중세의 흄이라고 한다. 왜인가? 그는 인과적 관계에 따라서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사실에서 다른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즉, 그는 원인을 결과에 묶어 두는 끈은 필연적이지도 명증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물론, 그는 여러 면에서 흄과 구별되지만 인과론의 논의에서 그가 취하는 필연성에 관한 태도는 다분히 흄과 유사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인론의 또 다른 전형을 알 가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것과 마심으로서 두 가지 것을 예로 들어보자. 배고픔에 대한 편안함과 먹음을 예로 들어보자. 불탐과 천에 불이 붙음을 그리고 빛과 태양의 일어남은 그리고 죽음과 몸으로부터 머리의 분리를 건강과 의학의 사용을... 그들은 그들의 실존에 앞서서 신의 율법의 결과로서 관계되어진다.

 이를 통하여 알 가찰리가 원인과 결과를 필연성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필연성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사고규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불에 천이 붙으면 당연히 천이 탈 것이라는 것을 인과적 필연성으로 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제2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제1원인이 앞서서 원인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다른 것을 원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천에 불이 붙어도 천이 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이 붙음과 천이 탐은 필연적 연관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태양이 일어나도 빛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 원인을 부정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이라는 진정한 원인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결속을 보장하지만, 우리가 팔을 올리려고 할때, 팔이 올라가는 것과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의지 사이의 필연적 결속을 배제한 것이다. 즉, 제1원인만을 인정하고 제2원인을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근대 말브랑쉬에게로 이어진다,

5.0 말브랑쉬는 중세 알 가찰리의 영향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모든 사물이 신에게 존재론적으로 의존됨을 근거로 인과론을 전개한다. 그에게 진정한 원인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결속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신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우리가 팔을 올리려는 것과의 필연적 결속에 의한 것이 아니며, 이는 인간 중심의 사고일 뿐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의 원인으로 신을 내세운다.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사용한 탁구공의 예에서 하나의 공이 다른 공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자연적 원인(제2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것이 인간이나 자연 사물을 넘어서 천사에게도 그렇다고 한다.

6.0 흄은 우선 전통적인 스콜라철학의 인과론적 논의는 결코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인론은 그에게 일부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이 둘은 모두 원인과 결과의 필연성을 거부한다. 이점에서 흄에게 우인론이라는 선배들의 논의는 배울만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차이도 있다. 그러한 차이는 과연 우인론자들과 흄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환원되어진다. 알 가찰리나 니콜라스 그리고 말브랑쉬는 신이라는 제1원인을 내세운다. 하지만, 감각에 의한 지각과 관념만을 원인으로 정의한 흄에게 경험 혹은 감각을 넘어선 신과 같은 존재에게 이는 떠넘기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간단히 원인으로 신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흄에게 받아드려질 수 없었다.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우인론은 제2원인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필연적 결속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우인론을 흄은 수용한다. 그리고 초경험적인 신이라는 제1원인자를 거부한다. 결국 인과론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흄의 인과론적 논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