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철학사

칸트, 인간 이성의 한계를 고백하다. 유지승 토마스철학학교 철학사

유학장 2014. 6. 3. 01:06

칸트, 인간 이성의 한계를 고백하다.

 

유 암브로시오 씀 (토마스철학학교)

 

20140531


맥주 한잔을 했다. 막막하다. 참 무력하다. 답답하다. 눈물이 난다. 나는 아프다. 과거 교통사고 후유증이 제법 심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아파도 혼자 아파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디에 가서 말을 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너무 걱정을 해서 말을 할 수 없고, 누군가는 너무 걱정을 하지 않아서 마치 날 꾀병을 부리는 것처럼 여겨서 말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상당수는 무관심하기에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말을 하지 않고 한참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다. 내용이 무엇인지 머리에 남지 않는다. 그냥 무엇인가 해야 하기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참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무력한 나 자신의 존재를 지각하는 순간이다. 혼자 아프고, 혼자 서글퍼 하고, 혼자 멍하게 앉아 있다 혼자 맥주를 마시고 혼자 자신의 초라함을 돌아보며, 참으로 서글픈 자신의 존재를 지각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생각한다고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 그런데 생각한다고 고로 골치 아프게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나에겐 더 적절해 보인다. 생각을 통하여 알게 되는 나는 참으로 초라하고 서글프기 때문이다. 생각하여 나의 존재를 알기는 했는데, 다른 한편 그 존재의 본질이 너무나 초라하다.


이때 커피 한잔과 철학책을 읽는다. 나에게 철학책은 바로 이때 매우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게 된다. 잠시라도 다른 골치 아픈 고민을 하며 나의 초라한 실존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Kant). 칸트는 나에게 그래도 조금은 선명한 철학자다. 두뇌의 용량이 작아서 칸트라는 거대한 용량으로만 수용 가능한 것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그저 작은 부분만 수용 가능하다 보니 그런지 모르겠다. 나에게 칸트는 제법 선명한 논리력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언어분석철학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상사(思想史)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이런 사람이 있구나! 대단하구나!”라며 놀란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칸트다. 특히 당시 한 노교수님이 적어주셨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순수이성비판(1781):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인식론

실천이성비판(1788):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윤리학

판단력비판(1790):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나?-미학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칸트는 쉽게 읽기 힘든 제법 두꺼운 책을 하나 적은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다. 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진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는 인식할 수 없으며, 그저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진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 과거 많은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하여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 능력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렇기에 과거 인간은 신에 대하여 혹은 사물 그 자체, 즉 감각으로 주어진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인간이 사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체(substantia), 즉 현상으로 주어진 것의 존재론적 근거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논의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인간 이성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인간 이성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실험한다. 인간은 앞서 말했듯이 시간과 공간 속에 주어진 것을 인간의 오성이 그 12가지 범주 가운데 판단한다. 그런데 사물 그 자체는 특정 장소에 특정 공간을 차지하면서 특정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감각이란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만을 지각한다. 그것은 벗어나면 우리는 감각할 수 없다. 사물 그 자체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은 그것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이제까지 인간들의 이성은 월권(越權)을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마치 이성의 당연한 권리인 듯이 굴었던 셈이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규정해 주고 싶었다.

 

당시 라이프니츠 노선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구현되는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신, 인간의 자유, 영혼불멸 등을 들었다. 이러한 경험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인간 정신의 순수 사유를 통하여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이러한 라이프니츠 노선에 서 당시 많은 철학자들의 말이 모두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정신은 그러한 능력이 없다 칸트는 확신했다. 진정 신학과 형이상학이 참다운 학문으로 이러한 문제를 들을 다룬다면, 참다운 학문의 기준에 적합해야 한다. 이 기준은 첫째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이어 했다. 둘째 그것이 어떤 새로운 지식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험적이어야 한다. 경험적 지식은 시시때때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 종합 판단이어야 한다. “아버지는 남자다라는 이러한 명제로는 새로운 학문을 구성할 수 없다. 주어는 분석하면 그 가운데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아버지가 무엇인지 온전히 안다면 당연한 사실일 뿐 여기에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이 추가로 생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명제로는 학문이 구성될 수 없다. 이러한 명제는 분석 명제라고 한다. 이러한 명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조건은 만족시켜도 온전한 학문을 구성하지 못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종합 명제라야 한다. , 주어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 내어 인식을 확장시키는 판단이어야 한다. “총각이 키가 크다라는 명제를 보자. 총각이란 개념이 키가 크다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경험 사실에 따라서 그 명제의 진리치도 달라지게 된다. “일부 남자는 불교도이다라는 명제도 보자. ‘일부 남자라는 개념에 불교도는 있지 않다. 이렇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낳는 종합 명제이어야 한다. 그러한 이러한 것은 경험에 의존하며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감각경험에 의존한다. 칸트는 숙제를 가지게 된다. 학문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선험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종합 판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선험성, 즉 경험에 앞서야 하며, 경험에서 독립적이면서, 종합 판단, 즉 경험 사실에 관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판단이어야 한다.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sche Satze a priori)이어야 한다. 그러면 과연 기존 형이상학이 신이 그러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신에 대하여 우리는 선험적이며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한가? 신학이나 전통 형이상학은 과연 학문인가?


머리 안에만 있는 지식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진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신은 인간 경험의 대상을 벗어나 있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인간 정신 가운데 범주는 감각을 통해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지는 것을 질서지울 때만 실질적인 인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기에 신을 인간의 정신 가운데 범주화할 수 없다. 신은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학문 대상으로 삼아 연구할 수 있겠는가? 전통 형이상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신을 다룰 수 있겠는가? 칸트는 이러한 질문들에 가장 근원적인 형태로 과연 이성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만일 이성이 할 수 없다면 학문이 이를 다룰 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은 자연 속에 일어난 것, 즉 시간과 공간 가운데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감각 경험, 즉 직관을 하며, 그 직관으로 주어진 것을 범주화하고, 지성으로 개념화한다고 보았다. 자연이란 결국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의 전체이며, 정신 가운데 범주화되어 포착된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 사물 자체가 아닌 현상에 그친다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혹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라고하는 명제는 선험적 종합 명제가 될 수 없다. 당장 종합명제가 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 이야기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경험으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선험적 종합 명제는 경험에 앞서야 하며, 경험에서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종합 명제, 즉 경험 사실에 관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명제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논의가 될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선험적 종합 명제가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신에 대하여 인간은 모른다. 신 그 자체를 인간은 알 수 없다.


요즘 살아가다 보면 인간 목사들 가운데 일부가 '신의 말씀'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전개하려 한다. 신의 말씀,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있을까? 신학을 공부한다고 인간이 신의 뜻을 알 수 있을까?

 

중세 후기부터 많은 신학자들이 고민 했다.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이미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내려졌다. 불가능하다!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 이성으로 신을 탐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나 엑하르트(Meister Eckhart)와 같은 중세 학자들은 이미 부정신학(否定神學), 즉 신에 대하여 어떠한 긍정적 진술도 신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좀 쉽게 이야기해보면 인간은 신을 어떠한 것으로 정의내릴 수 없고, 그러한 정의가 진정 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의 위대함은 인간의 지성으로 포착되지 않으며, 설사 포착이 된다고 하여도 인간의 언어로 담아 낼 수 없다. 신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칸트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부정신학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알 수 없다.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신을 인간의 지력으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 가운데 범주화되지도 않으며 시간과 공간 가운데 주어진 것들처럼 감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은 면접과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공간 가운데 측량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시간 가운데 존재하여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는 그러한 존재도 아니다. 그렇기에 신을 인간은 알 수 없다. 신에 대하여 인간은 선험적 종합 판단을 할 수 없고, 전통 형이상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론 이야기할 수 없다.


칸트는 인간으로 자신의 이성 한계를 고백했다. 인간은 신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신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도덕의 완성을 위하여 신을 요청한다. 인간의 이론 이성, 즉 이론으로 신의 존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실천 이성의 차원에선 다르다. 칸트에게 도덕이란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다른 이유, 즉 이기심 때문에 행하는 것은 도덕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따른 행위 정도일 뿐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약자에게 배려해야하고, 나누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이유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산다고 행복하겠는가? 해야만 하기에 힘든 도덕적 삶을 산다고 인간이 행복하겠는가? 그러다가 의로운 죽음이라지만 죽임을 당하면 어찌하겠는가? 독재에 맞서다 죽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죽는다면, 분명 칸트의 도덕을 충실히 행하다가 마지막엔 상당한 불행을 경험하게 된 것은 아니겠는가? 반면 조국을 팔아먹고, 독재자에 부력하면서 살아감에도 살아있는 동안 배불린 산다면, 이러한 삶은 또 어찌하겠는가? 그는 여기에서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인간 이성은 신의 존재를 요청해볼 뿐이다. 그를 온전히 파악하여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일부 목사들이 신의 뜻이라며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칸트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는 절대 신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신을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안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신앙이란 것이 언어로 표현 될 때 이성을 마주한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맥락으로 어찌 이야기할지 그 목사의 뇌는 가만히 정지해있고 신이 그의 혀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한국어도 영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아닌 언어로 다가올 것이고,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우리의 이성에 적합한 다가왔었다. 일부 종교인의 욕심, 그 자신이 이것이 신의 뜻이길 바라는 것을 신의 뜻이라며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칸트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신은 알 수 없는 존재다. 그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것을 칸트는 어떻게 생각할까? 신앙이 도덕적 행위라면 신앙은 신앙 그 자체가 목적어야 한다. 천국을 가지 위한 수단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도 아니되며, 돈을 벌거나 건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도 아니 된다. 신앙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가 십자가 달린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의 아픔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해야 하는 그 도덕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


칸트는 이론으론 신을 담을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이 요즘 종교인들의 여러 작태(作態)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맥주 한잔을 한다. 그리고 다시 칸트의 뒤에 다른 철학자가 날 보며 웃는다. 그래 만나고 이야기하다 자야겠다. 다시 책을 든다.